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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의 문화관광/국가.도 지정 문화재

전북문화재자료 제22호 신안서원 [新安書院]

by 임실사랑 2013. 6. 18.

 

 

전라북도 임실군 임실읍 신안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서원

지정번호   전북문화재자료 제22호
지정연도   1984년 4월 1일
소장   한도수
소재지   전북 임실군 임실읍 신안리 447
시대   조선시대
분류   서원

ㆍ연 혁

신안서원은 원래 임실읍 낙촌리에 위치하였다가 후에 금동으로 옮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선조21년(1588) 한호겸 선생의 문하생들이 스승의 덕을 흠모하여 사당을 건립하고 신안서원이라 이름하였다. 정유재란(1597)때에 소실되었으며 오랫동안 유지만 남아 있다가, 현종 10년(1669)에 재건되었다.
처음에는 문간공 이서 선생과 신제 한호겸 선생만을 봉안하였으나, 정조 12년(1788)에 사림들의 결의에 따라 둔학 송경원. 만회당 한필성. 홍운정 한명우. 거묵당 송시태를 추배하고, 다시 정문공 김수근. 무명제 강백진을 추배하여 모두 8현을 배양하였다.
순조(1819)때 도내 유림의 공의에 따라 주부자 회암선생의 영정을 봉안키로 하니 이는 순창군 무이 서원의 예에 따른 것으로, 주희 선생의 영정은 이해 9월에 함평 자양서원에서 복사해왔다. 그후 신안서원도 고종 5년에 훼손되었으며 현존하는 서원 시설은 1958년 10월에 준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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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4월 1일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22호로 지정되었다.

1588년(선조 21) 한호겸(
)의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문인들이 창건하였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오랫동안 유지만 남아 있다가 1669년(현종 10)에 중건하였으나,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폐되었다. 1936년에 단을 설치하였으며, 광복 후 1958년 10월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처음에는 이서와 한호겸만을 봉안하였으나, 1788(정조 12)에 사림들의 결의에 따라 송경원(
)·한필성()·한명유()·송시태()를 추가하고, 다시 김수()·강백진()을 추가, 모두 8현을 배향하였다. 1819년에는 도내 유림의 공의에 따라 회암선생의 영정을 봉안키로 했는데 이는 순창군 무이서원의 예에 따른 것이다.

이해 9월에는 함평의 자양서원(
)에 있던 주자(:)의 영정을 이곳으로 옮겨와 주벽()으로 봉안하고 ‘신안’이라는 사액()을 받아 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선현배향,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사당과 정면 4칸, 2칸의 강당은 모두 팔작지붕이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동재(
)는 맞배지붕으로 된 한옥으로, 원래 임실읍 낙촌리에 있다가 금동으로 옮겨 현재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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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와 신재 한호겸의 위패를 모신 서원이다.

한호겸은 성리학자로서 항상 주희의 영정을 모셔왔는데, 그가 죽은 뒤 조선 선조 21년(1588)에 제자들이 그의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신안사라는 사당을 짓고 주희와 그의 위패를 함께 모셨다. 그 뒤 정유재란으로 불탄 것을 현종 10년(1669)에 다시 세웠고, 순조 19년(1819)에는 나라의 지원을 받는 사액서원 이 되어 이름도 신안서원로 바뀌었다. 고종 5년(1868)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가 1958년에 다시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원 안에 있는 건물로는 사당, 강당 , 동재, 신문, 고사, 창고, 대문 등이 있다.사당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 이다. 강당은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의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 으로 되어 있다.

현재 이곳에는 주희를 중심으로 이서·송경원·한호겸·한필성·강백진·한명유·송시열·김수근 등을 모시고 해마다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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