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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문화유산] 080. 바이마르와 뎃소 소재 바우하우스 유적

by 임실사랑 2008. 12. 15.

독일 (GERMANY)

[세계 문화유산] 080. 바이마르와 뎃소 소재 바우하우스 유적(The Bauhaus & its sites in Weimar and Dessau : 문화, 1996 )

현대 건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바우하우스(Bauhaus)와 바우하우스의 발생지인 바이마르(Weimar), 바우하우스의 창시자인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가 건축한 바우하우스 건물(Bauhausgebäude) 등의 많은 유적이 남아있는 데사우(Dessau)가 1996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 되었다.
원어명 Das Bauhaus und seine Stätten in Weimar und Dessau
소재지 독일 작센안할트주, 튀링겐주
세계유산 지정년도 1996년
바우하우스(Bauhaus)의 창시자인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에 의해 그로피우스 스타일의 건물 제막식이 있었던 이후 70년이 지난 1996년 12월, 바우하우스와 데사우,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 유적 소재지가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바우하우스는 1919년에서 1933년까지 존재했던 독일의 조형학교였다. 바우하우스의 설립자인 발터 그로피우스를 시작으로 한네스 마이어(Hannes Mayer), 모호이너지(Lazlo Moholy-Nagy),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등의 건축물과 작품들은 20세기 건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바우하우스 양식의 토대가 되었다.

1925년에는 정치, 경제적인 문제로 폐쇄될 위기를 맞았지만 데사우로 근거지를 옮겨 명맥을 유지하였고 1926년에는 그로피우스가 설계한 바우하우스 건물(Bauhausgebäude)이 지어지기도 했다. 1930년부터 1933년까지는 건축가였던 미스반데어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가 바우하우스의 책임자의 자리에 있었는데 1932년 나치스에 의해 데사우를 떠나 베를린으로 다시 한번 바우하우스의 근거지를 옮기게 되었다. 그들의 급진적이고 국제적인 움직임이 나치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탓이었다. 결국 1년만인 1933년 바우하우스는 완전히 폐쇄될 수 밖에 없었다. 폐쇄 이후 그로피우스를 비롯한 여러 바우하우스 선구자들은 미국으로 이주해 계속해서 바우하우스의 정신을 이어갔다. 바우하우스 자체의 존속 기간은 길지 않았으나 세계적으로 미친 영향은 엄청나서 현대 건축과 디자인의 방향을 새롭게 제시했다는 면에서 그 의미가 대단하다.

그로피우스가 건축한 데사우의 바우하우스 건물은 그동안 유럽과 독일에서 일반적으로 지어졌던 뾰족한 지붕의 전통적인 건물들과 달리 비대칭적인 평면 구성과 평평한 지붕, 흰색으로 칠한 벽, 길쪽으로 나 있는 수평적인 창문 등이 당시의 건축 문화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며 독일의 우파 정치인들과 나치스에게는 전통적 독일의 건축 양식을 거스르는 반동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같은 시기에 지어진 마이스터의 집(Meisterhäuser)은 그로피우스를 비롯한 바우하우스의 교수들이 실제로 함께 살며 일하던 곳으로 바우하우스 건축 양식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데사우의 바우하우스 건물은 제2차세계대전의 폭격으로 일부 파괴 되었으나 1976년에 재건되었으며 재건 과정에서 좀 더 현대화 되었다. 1996년에서 2006년까지는 유적 보호 관련 법률에 따라 재정비, 보수되어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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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마르와 데사우의 바우하우스 관련 유산

바우하우스 교사의 임명 목록을 보면, 마치 조형 예술 분야의 인명 사전에서 골라 적은 것처럼 생각된다. 파울 클레, 바실리 칸딘스키, 라스로 모호리 나지, 오스카 슐렌머, 라이오넬 파이닝거, 루트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 등의 이름을 볼 수 있다. 작센 대공국 산하의 미술 학교와, 앙리 반 데 벨드의 지도를 받다가 1915년에 폐교된 공예 학교의 남은 조직이 통합되어 생긴 바우하우스는 창립자인 발터 그로피우스의 인솔하에 1919년 이후 보편적이고 참신한 건축 예술의 중심지가 된다. 바이마르에 설립된 바우하우스는 1925년 이후 데사우로 옮겨 ‘조형 대학’이라고 칭했다.

 바이마르에서의 바우하우스 설립 선언
  독일의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는 1919년 4월에 바우하우스의 설립을 선언하면서 “바우하우스는 모든 예술 창조 행위를 결집시켜 조각, 회화, 공예, 수작업 등의 모든 공방 예술을 상호 불가분의 구성 요소로 해, 새로운 건축 예술로 재통합하는 데 힘쓴다.”고 강조했다. 이 주장은 종종 쓸모없는 부담이라고 폄하되어 온 전통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새로운 미학이라는 것의 혁신성은 열려진 정신과 적극적인 실험 정신에서 생긴다.
  그리고 바우하우스는 보편적인 건축 예술의 전위에 서서 예술과 수작업을 융합하는데 성공하고, 게다가 근대 공업과 제휴하는데로 나아갔다. 그 결과 기능주의의 엄격한 형태와 즉물적인 목적 합리성이 새로운 미학을 이루고, 이윽고 세계에 인지된다. 바우하우스는 근대 건축과 도시계획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실천을 동반하는 건축 분야는 데사우 이전 후에 처음으로 설치되었기 때문에, 바이마르 바우하우스의 건축 부문은 제도판 위에서의 디자인에 만족해야 했다. 언뜻 보면 단점으로 생각되는 이 같은 점도, 오히려 초기 단계에 실험적인 시도를 해볼 여유를 부여했으며, 그것이 나중의 데사우 바우하우스의 운영에 좋은 영향을 미쳤다.
  바이마르 바우하우스의 건축 부문의 증언자인 현존 유일의 작품은, 1923년의 바우하우스전에서 건설된 게오르크 무헤가 제작한 실험 부택인 ‘하우스 암 호른’이다. 그것은 엄격한 구성으로 된 정방형 플랜의 콘크리트 구조 1가족용 주택이다. 바이마르 바우하우스의 첫 번째 특징은 우선 공방 수가 많다는 것이다. 그 성과가 이 교육 시설을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예술 학교 중 하나로 만들었다.

 

데사우로의 이전과 개화
  1925년, 바우하우스는 바이마르에서 데사우로 이전하고, ‘호호슈레 퓨어 게슈타르츤크(조형대학)’라고 명명했다. 교장 발터 그로피우스가 데사우에 지은 건축물 중 제2차 세계대전 때의 공습을 면해 무사히 남아 있는 것은, 노란 색의 경질 벽돌을 입히고 유리 턴장으로 덮인 반원형 철골조 건물인 데사우 직업 안정소이다. 이른바 ‘마이스터(교수) 주택’과 게오르크 무헤, 리햐르트 파우리크가 지은 철골조 주택, 또 그 형태가 전위적으로 보이는 칼 피거 설계의 ‘피거하우스’, 한네스 마이어가 설계한 5동의 편복도식 집합 주택이, 제2차 세계대전 후 부분적으로 개조되어 현존한다.
  물론 바우하우스의 건축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전화를 입은 후에 부분적으로 복원된 바우하우스 교사를 빼놓을 수 없다. 그것은 예리한 기하학적 형태를 이루고, 수평으로 펼쳐진 철근 콘크리트 구조의 건축으로 되어 있으며, 각 건축 블록이 서로 교묘하게 조합된 형태를 이룬다. 전문가들은 그로피우스가 지은 이 복합 건축의 모습을 근대 건축으로 가는 이정표로 보고 있다. 건축가들은 데사우 테르텐 지역에 넓은 건축 실험장을 구해 1926년 이후 연동식 집합 주택으로 된 주택 단지를 건설한다. 그것은 건축 현장에서 제조되는 슬래그 콘크리트판과 콘크리트 구조의 양재로 구성되는, 프리퍼블리케이션의 선구를 이루는 것이며, 합리적으로 계산된 ‘현장 공정 계획’에 따라 건축 장인이 조립했다.
  그러나 점점 더 성과를 올리고 있던 데사우 바우하우스는 1923년에 나치의 압력으로 폐쇄되어 베를린으로 옮겨지고, 1933년에 드디어 폐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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