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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향 임실/임실군 자료[스크랩]

[스크랩] 임실 성미산성(2) : <삼국사기>의 각산성인가?

by 임실사랑 2014. 4. 9.

<2011년 2월 8일>

~ 임실 성미산성(1)에서 계속 ~

 

표지사진 - 성미산성의 동벽

 

 

임실 성미산성에 대한 고고학적 결과

 

 전북문화재연구원은 2007년 3월 2일부터 임실 성미산성에 대한 발굴 조사를 시작하여 7월 5일 현장에서 현장설명회를 개최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A. 전북문화재연구원이 2007년 3월2일 이후 성미산성 일대 구역 중에서도 내부 건물터와 남쪽편 대지, 그리고 수구지(水口址) 등을 집중 조사한 결과, 성벽은 삼국시대에 처음 축조되었으며 그 구조는 내벽과 외벽에다가 모두 판 모양으로 쪼갠 돌을 쌓아 덧댄 소위 협축식(夾築式)으로 확인되었다. 이런 축조방식은 전남 동부지역에서 확인된 백제산성 축조방식과 유사하다. B. 이번 조사 결과 원형으로 만든 석축 집수시설(우물)은 두 곳이 확인됐다. 부정형 깬돌을 이용해 쌓은 이 집수시설들은 누수 방지를 위해 바닥과 벽면에 점토를 발랐다. 이 같은 우물 유적은 백제시대 산성으로는 여수 고락산성과 광양 마로산성 등지에서 나온 적이 있다. C. 백제시대 인장와(印章瓦)는 성곽 내부 남편 대지 퇴적층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다량으로 출토됐다. 인장와는 도장을 찍은 기와를 말한다. 이 기와들에서는 ‘上(북쪽)·中(중앙)·下(남쪽)·前(남쪽)’ 외에 ‘五’와 같은 백제시대 수도 혹은 지방 행정 조직인 5부를 지칭했을 공산이 큰 글자가 확인됐다. 옛 백제 영역에서 이와 같은 5부명(五部名) 인장와는 부여를 제외하고는 청주 부모산성(‘前’이라는 글자), 금산 백령산성(‘上部’라는 글자), 정읍 고부 구읍성(‘上部上巷’이라는 글자) 등지에서 출토된 적이 있다. D. 이곳에서는 통일신라시대 금동여래입상도 출토됐다. 금동여래입상은 성벽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성벽 상층 퇴적토에서 1점 확인됐다. 높이 9.8㎝이며 연꽃 이파리 8개를 돌린 팔엽연화문(八葉蓮花文) 좌대(받침대)를 갖춘 불상으로서 법의는 양쪽 어깨에 올린 통견의를 하고 있고, 가슴 아래로는 늘어뜨린 U자형 주름이 확인된다. 수인(手印)은 통인(通印)이나 일부가 훼손됐다. 형태로 보아 8세기 무렵 호신불로 제작된 것으로 판단되며, 비슷한 불상으로는 익산 왕궁리 5층 석탑 내부에서 수습된 청동여래입상(국보 123~4호)과 익산 사자암 출토 청동약사여래입상 등이 있다.


 이와 관련해서 전영래 소장의 논문이 주목을 끈다. 발굴조사 8년 전인 1999년 7월 29일 전북 전주시 목원예식장에서 열린 ‘임실 성미산성(城嵋山城) 복원 추진’ 세미나에서 전영래(全榮來) 한서고대학연구소장은 ‘임실, 성미산성과 각산성’이란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임실 성미산성은 신라와 백제가 대립하고 있던 6-7세기 소백산맥을 국경으로 하는 주저항선에 버금가는 제2의 방어선으로 백제의 전략적 병참기지로 볼 수 있다. 전략적 병참기지는 신속한 인원동원과 식량의 확보가 관건인데 임실과 관촌은 서해안 곡창지대의 식량을 운반하는 물류 중심지였다. 신라가 별리성(현 거창)을 통과해 남동쪽 진출을 위해 임실과 관촌지역을 거쳐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성미산성은 백제의 전략적 요충지로 기능했다. 전라좌도에 해당하는 현 전라선 철도노선은 당시 중요한 군사교통로로 임실은 한반도 횡단로와 전라선을 연결하는 십자로의 교차점인 탓에 백제는 신라의 공격에 대비해 백제 무왕 6년(605) 성미산성을 축조했다. 삼국사기 등 문헌에 따르면 백제와 신라는 옛 가야지방의 땅을 차기하기 위해 각산성(角山城)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각산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미상으로 되어있다. 출토된 유물과 지정학적 관점 등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뤄 임실 성미산성이 각산성으로 추정되며 이 추정이 맞다면 백제성 연구에 획기적 전기가 될 것이다.


 당시 전영래 소장은 임실 성미산성이 백제 무왕 5년(605)에 축조한 각산성으로 추정하였다. 2007년 발굴 조사에서 오부명 인장와가 출현함으로써 전영래 소장의 주장에 힘을 실어 주고 있다. 오부명 인장와의 출현은 임실 성미산성이 지방 행정·군사의 중심 요지였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남부여는 602년 좌평 해수가 4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신라의 모산성을 공격하였다. 하지만 모산성 공략이 실패로 끝나자 신라의 서진에 대항하여 605년 각산성을 구축한다. 각산성의 위치는 동서와 남북의 십자 교차점인 임실 관촌 일대로 사료되는데, 그 요지에 임실 성미산성이 있다. 더욱이 이곳에서 오부명 인장와가 출현함으로써 <삼국사기 무왕 조>에 축성 기사에 나오는 각산성일 가능성은 매우 농후하다.

 

 

성미산성 정상의 장대지

 

평탄지. 건물터로 추정됨.

 

이끼가 낀 서벽. 아래로 섬진강이 흐른다.

 

이끼가 낀 성돌에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진다. 동벽은 복원을 해 놓아서 고성의 정취를 느낄 수 없었지만, 서벽은 시간의 흐름을 완연히 느낄 수 있어 좋았다.

 

 

 

 

 

되돌려 찍어 보았다.

 

 

 

 

 

이끼가 낀 성돌

 

 

 

섬진강에서 올려다 볼 서벽의 위용은 가히 상상이 간다.

 

평탄지. 동벽을 올랐던 곳.

 

동남방을 바라보다. 당시 신라와 남부여간의 분쟁지역일 것으로 추정되는 거사물 지역으로 향한다. 

 

원래 있던 곳으로 회귀.

 

동벽

 

동벽을 타고 내려오며...

 

되돌아 동벽을 바라보다.

 

남쪽으로 섬진강이 보이고, 물길이 산 능선에 가로막혀 좌류한다. 가로막은 산 능선 우측으로 대리산성이 있어 서진교통로를 보호하고 있다. 

 

지금은 관촌면 일대가 임실군의 중심지가 아니지만, 남부여와 신라 대에서는 분명 관촌면 성미산성이 군의 치소였을 것이다. 그리고 필자는 남부여 대의 임실군은 각산군으로 불리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추정해 본다.

 

 

 

동녘

 

동남방

 

섬진강과 대리산성

 

기와 조각

 

산성 내부

 

성미산성은 522m의 테뫼식 산성으로 규모가 중급 수준이라 산성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사진 끝 선이 서벽이다. 전쟁이 끝나고 치소가 협소하여 군 소재지를 현재의 임실읍 지역으로 이전하였을 것이다.

 

동벽

 

 

 

 

 

산성 내부

 

남벽 구간으로 이어지는 성벽과 좌측 아래의 사선대

 

남벽 구간과 산성 내부

 

남벽 부근 산성 내부

 

못내 아쉬워 다시 동벽을 바라 보다.

 

남쪽. 사진 좌측으로 17번 국도가 열려있고 성수지맥을 넘어면 섬진강의 지류인 오수천 수계가 나온다. 이 지역이 당시의 남부여와 신라의 분쟁 지역인 거사물 지역이다.

 

산성 아래 사선대. 그 뒤의 평원에서 좌측 길이 거사물로 향하는 곳이며, 우측 길이 섬진강 수계를 따라 서진하는 동서 교통로이다. 백두대간(육십령)~장계분지~진안~마령면~임실 성미산성(관촌면)~김제~부안으로 이어지는 동서교통로는 가야인들에 의해 개척되었으며, 신라와 남부여는 관산성 전쟁 이후 이 통로를 따라 가야의 영역을 잠식해 갔다.

 

남벽. 남벽과 서벽 일부는 답사하기가 곤란해서 이정도에서 마무리하였다.

 

동벽 시작구간

 

동남방

 

하산길에 찍은 괴상한 나무. 이곳 지기도 부흥군의 원과 척이 서려있는 듯하다.

 

하산길은 수월사로 향하지 않고, 수월사 들어가기 전 좌측 임도로 향했다. 성미산성 수구 부근을 바라다 보았다.

 

후답자는 수월사로 들어가지 마시고 이 길로...

 

수월사 들어가기 전 좌측 임도. 성미산성 오르는 길.

 

수월사 가는 길.

 

해가 질 무렵 49번 지방도를 타고 가다가 성미산성을 바라보다. 하늘도깨비 사진 전문가는 아니잖어! ^^

출처 : 하늘도깨비
글쓴이 : 하늘도깨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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