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음악과 시 사진,그리고../지구촌 풍경

대자연이 전한 선물 노르웨이(Norway) 피오르(fjord)

by 임실사랑 2009. 6. 3.

지질학적으로 피오르(fjord 또는 fiord)는 빙하활동에 의해 깎인 계곡에 형성된 가파른 절벽이 있는 길고, 좁은 후미이다.

 

노르웨이 역사

선사시대와 바이킹시대

고고학적인 자료들은 노르웨이가 적어도 BC 6천년 전 이후로 주민들이 거주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노르웨이의 주요 주민들이 현재의 독일로부터 스칸디나비아로 이주했다는데 동의한다. AD 1세기에 노르웨이는 수많은 작은 왕국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하랄(Harald Hårfagre)이 872년 스타방에르(Stavanger)의 하프르스피오르(Hafrsfjord)전투 이후 하나로 그들을 통일했고, 이렇게 통일된 노르웨이의 최초의 왕이 되었다. 

AD 8-11세기는 바이킹시대의 확장과 이주가 특징이다. 많은 노르웨이인들이 아이슬란드, 페로(Faroe)제도, 그린란드 그리고 영국과 아일랜드 일부 지역으로 생존을 위해 떠났다. 오늘날 리머릭, 더블린, 워터포드 등의 아일랜드의 도시들은 노르웨이 정착민들에 의해 건설된 것이다. 노르웨이전통은 10세기와 11세기에 기독교로 천천히 대체되었다.

칼마르(Kalmar) 연합과, 덴마크와의 연합

1319년 스웨덴과 노르웨이는 마그너스 에릭슨(Magnus Eriksson)왕 아래 통일되었다. 1349년 흑사병으로 인구의 50-60%가 줄었다. 이시기에 사회경제적으로 쇠락하는 결과를 낳았다. 표면상 당시 왕정은 노르딕 국가들 사이의 개별적인 인적연합으로 끝나고, 결국 이들 국가들이 칼마르연합에 가입하면서 덴마크의 마가렛1세(Margrethe I) 여왕이 노르웨이, 덴마크 그리고 스웨덴의 국왕에 올랐다. 비록 스웨덴이 1521년 연합을 탈퇴했지만, 노르웨이는 1814년까지 남아서 총 436년 동안 지속되었다. 19세기 국가적인 낭만주의시대에 왕국의 왕실, 지식인 그리고 통치력의 모든 것이 덴마크 코펜하겐에 집중된 이후로 이 시기를 일부에서 “400년의 밤”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다른 요인들도 이 기간 노르웨이의 쇠퇴에 영향을 미쳤다. 1536년 개신교가 도입되면서, 트론헤임(Trondheim)의 대주교는 세력이 약화되었고 대신 교회의 수입은 덴마크 코펜하겐의 궁정에서 분배 받았다. 노르웨이는 니다로스(Nidaros)성지 올라프(Olav: 995-1030)성자 유적의 안정적인 순례자들을 잃었고, 그들과 비례하여 나머지 유럽의 문화경제적인 삶과 접촉이 많아졌다. 게다가 노르웨이는 덴마크-노르웨이와 스웨덴간의 전쟁의 결과로 스웨덴의 Båhuslen, Jemtland 그리고 Herjedalen 지방을 상실하면서 17세기에 영토가 감소했다.

스웨덴과 연합(19세기)

덴마크-노르웨이가 영국의 공경을 받은 후, 이들은 1812년 전쟁이 만든 비참한 상황과 대기근속에 나폴레옹과 동맹에 들어갔다. 1814년 패배한 측에서 자체적으로 세운 덴마크 왕국은 아이슬랜드, 그린란드 페로(Faroe)제도 등의 고대 노르웨이 지방들은 덴마크 왕실에 존속시키면서 스웨덴 왕국에 노르웨이의 이양을 강요하였다. 노르웨이는 이 기회를 이용해 독립을 선언하고 미국과 프랑스를 모델로 한 헌법을 채택했으며, 1814 3 17일 왕으로 덴마크 왕세자 크리스티안 프레디릭(Christian Fredirik)을 선정했다. 이는 노르웨이-스웨덴 관계를 악화시켜 전쟁의 원인이 되었지만, 스웨덴군은 노르웨이군을 완전히 물리칠 정도로 강하지 못했고, 노르웨이의 국고는 전쟁을 오래 지속할 만큼 충분하지 못햇다. 그리고 영국과 러시아 해군이 노르웨이 해안을 봉쇄하면서, 노르웨이는 스웨덴과의 인적연합을 체결하는데 동의했다. 이 협정하에 노르웨이는 외교를 제외한 자유헌법과 독립제도를 유지했다.

또한 이 기간에 노르웨이인들이 독특한 민족성을 정의하고 표현하려 하면서 노르웨이 낭만적 민족주의가 등장했다. 이 운동은 문학, 그림, 음악과 오늘날 노르웨이의 공식문자 Bokmål Nynorsk의 형태가 된 노르웨이의 고유문자를 제정하기 위한 언어정책을 포함한 문화전반에 퍼졌다.

근대

노르웨이의 선박왕겸 정치가로 1905-1907년 노르웨이의 수상 크리스티안 미켈센(Christian Michelsen: 1857-1925)은 1905년 6월 7일 스웨덴으로부터 노르웨이를 평화적으로 분리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국민투표에서 국민들이 공화제 이상으로 군주제를 선호하는 것을 확인한 후, 노르웨이 정부는 덴마크 왕자 카를(Carl)을 노르웨이의 왕위에 앉혔고 의회는 만장일치로 이를 통과시켰다. 그는 독립 노르웨이의 중세 왕을 따라서 호꼰7세(Haakon VII)란 이름을 따랐다. 1898년 모든 남자에게 투표권이 허용되었고, 1913년 모든 여성으로 확대되었다.

1차 세계대전 중에 노르웨이는 중립국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노르웨이는 독일에 대한 무역봉쇄에 합류한 데다가 염가로 대 상단의 대부분을 점차 장악하려는 영국에 의해 압력을 받고 있었다. 노르웨이는 또한 2차 세계대전 중에도 중립을 주장했지만, 1940 4 9일 독일군이 침략했다. 노르웨이는 독일의 기습공격에 대비하지 못했고, 군사저항은 2개월 만에 끝났다. 북쪽의 무장한 군대는 프랑스가 함락되면서 연합국의 도움이 끊긴 후 6 10에 항복을 강요당할 때까지 나르빅(Narvik)전투에서 독일 군에 맞서 저항을 시작했다. 왕 호꾼과 노르웨이 정부는 런던의 로더히드(Rotherhithe)로 망명하여 투쟁을 지속했다.

침략한 당일 민족사회주의당의 두 공동지도자는 권력을 잡으려 하였으나, 독일 점령자들에 의해 강제로 물러났다. 실권은 독일 점령당국의 지도자에 의해 행사되었다. 수상으로서 Quiling은 후에 독일 통제하의 괴뢰정부를 구성했다. 나치점령의 5년 동안 노르웨이인들은 무장투쟁과 시민불복종 운동으로 독일 점령군과 싸우며 저항운동을 지속했다. 하지만 연합국 측의 전쟁노력에 중요한 것은 노르웨이의 전체상선의 역할이었다. 침략 당시 노르웨이는 세계 4대의 상선 보유국이었다. 그것은 전쟁 내내 그리고 뒝케르크(Dunkrik)철수에서 노르망디(Normandy)상륙까지 모든 군사작전에 참여한 동맹군 휘하의 노르웨이 해운회사 Nortraship에 의해 주도되었다.

전후

1945-1961년 노동당은 의회에서 절대적인 다수를 차지했다. 아이나르 가르합슨(Einar Gerhardsen: 1897-1987, 에이나르 게르하르트센)수상이 이끄는 정부는 정부재정을 투입한 산업화와 노동조합과 사용자 조직의 협력을 강조한 케인즈 경제학에 착안한 경제계획에 착수했다. 비록 유제품의 배급이 1949년에 철폐되고, 주택과 자동차의 가격통제와 배급은 1960년까지 지속되었지만, 전시에 소유했던 경제에 대한 많은 정부의 통제수단이 계속 유지되었다.

영국과 미국과의 전시 동맹은 전후에도 지속되었다. 비록 사회주의 경제의 목표를 추구했지만, 노동당은 특히 소련이 194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권력을 강탈한 후 스스로 공산주의자들과 거리를 두었고 미국과 연대한 외교군사정책을 강화했다. 노르웨이는 1947년 마샬(Marshall)원조를 받았고 다음해 OECD, 1949년에 NATO에 가입했다.

1975년경 산업의 노동자비율과 절대적인 수가 절정에 이르렀다. 그 후 대량 생산공장과 해운과 같은 노동 집약적인 산업들과 서비스고용은 크게 줄어들고 있다. 1969 Philips Petroleum은 에코피스크(Ekofisk) 유전에서 석유자원을 발견했다. 1973년 정부는 국영석유회사 스탯오일(Statoil)사를 설립했다. 오일 생산은 석유산업에 필요한 막대한 투자로 인해 1980년대 이전에는 순이익이 나지 못했다.

노르웨이는 유럽자유무역지역(EFTA)의 창립회원의 하나이다. 유럽연합에 가입하기 위한 두 번의 국민투표는 근소한 차이로 통과 되지 못했다. 1981년 꼬레 빌로크(Kåre Willoch)가 이끄는 보수당 정부는 조세삭감, 경제적 자유화, 시장의 규제철폐 그리고 기록적인 고인플레이션을 제어 등의 정책으로 저성장 고물가 경제를 탈피를 내걸고 노동당 대신 정권을 잡았다.

노르웨이 최초의 여성 총리 노동당의 그로 할렘 브룬트란(Gro Harlem Brundtland)는 사회보장, 환경보호 그리고 양성평등과 같은 전통적인 노동문제들을 뒤로 한 채 그녀의 오른팔인 전임자의 수많은 개혁을 지속했다. 1990년대 후반에 노르웨이는 대외채무를 갚고 국부펀드를 적립하기 시작했다. 1999년 이후 정치를 구분하는 논쟁의 하나는 석유수입의 지출수준이다.

피오르의 형성

피오르의 원인은 빙하가 퇴적물을 운반하면서 주변 기반암을 침식하여 U자 모양의 계곡으로 깎아 낸 것이다. 이런 계곡의 대부분이 근래의 빙하기에 형성되었다. 또한 빙하의 용해는 얼음하중과 침식된 퇴적물을 이동시키므로 지구 지각의 반동을 수반하게 된다. 일부의 경우 이 반동이 해수면의 상승보다 빠르다. 하지만 대부분의 피오르는 이웃한 해수면 보다 깊은데, 노르웨이 소그네(Sogne, 송네)피오르는 해수면 아래로 1,300m에 이른다. 피오르는 일반적으로 과거 빙하의 단퇴석에 의해 입구에 턱이나 둔덕을 가지고 있는데, 많은 경우에 빠른 물살과 큰 조류의 원인이 된다. 노르웨이 쌀스트라우만(Saltstraumen)은 종종 세계 최강조류로 언급된다. 이런 특징들은 상승하는 해수면이 범람하여 계곡을 수몰시킨 리아스식해안과 구별된다.

쌀스트라우만: http://www.youtube.com/watch?v=QifgPL--pG8

피오르의 특징과 변화

산호초

2000년에 들어서야 세계최대의 산호초 일부가 노르웨이 피오르의 해저를 따라서 발견되었다. 이들 산호초들은 노르웨이 북쪽에서 남쪽까지 도처의 피오르에서 발견되었다. 산호초에 의지하는 해양생물은 노르웨이 해안선이 왜 그와 같이 풍부한 어장인가에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로 여겨진다. 이 발견은 상당히 새로운 것으로 작은 연구가 이미 행해지고 있다. 지금까지 60m에서 최초의 산호초를 발견한 심해 잠수부만이 그곳을 방문했고 그것도 세 번의 잠수뿐이었다. 산호초들은 플랑크톤, 산호, 말미잘, 물고기, 일부 상어종들 그리고 암초 위에서 발견되는 더 많은 종과 같은 수천 종의 생물들의 안식처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종들이 위쪽보다 더 많은 물기둥의 압력과 받으며 심해의 암흑 속에 삶을 적응했다.  

뉴질랜드의 피오르도 심해 산호들의 고향이지만, 어두운 민물의 표층은 일반적인 것보다 훨씬 낮은 물에서 자라는 산호들이 서식할 수 있다. 밀포드 사운드(Milford Sound)의 수중 감시소는 잠수를 하지 않고 관광객들이 볼 수 있는 곳이다.

암초들(Skerries)

피오르 지역의 바다쪽 가장자리 근처의 몇몇 장소에는 빙식해협에는 항해를 위협하는 단순한 바위나 암초에서 커다랗고 산 같은 수천 개의 섬 조각으로 나뉘어진 바위 해안이 수없이 그리고 다방면에 분포한다. 이들은 암초들이라 부른다. 암초란 말은 바다의 바위를 의미하는 고대 노르웨이어 Sker에서 유래하였다.

암초들은 복잡한 배열 속에 교차한 다른 계곡들과 함께 해안과 직각을 이루는 빙하작용으로 형성된 계곡들이 물에 잠겨있는 피오르들의 하구에 통상적으로 형성되어 있다. 노르웨이의 섬 주변은 이런 암초지대인데, 교차한 수많은 피오르드들이 해안과 평행하게 배열되어 있고 거의 원래대로 보존된 산과 같은 섬들과 암초들이 뒤편의 해협을 보호하고 있다. 노르웨이 스따방에르(Stavanger)에서 North Cape까지 총 1,600km에 이르는 보호 수로를 통해서 이런 해협들을 누구나 여행할 수 있다. Bilndleia는 노르웨이 남부의 크리스티안산(Kristiansand) 근처에서 시작해 릴레산(Lillesand)을 통과하는 암초로부터 보호된 수로이다. 보후슬란(Bohuslän)을 낀 스웨덴 해안 역시 암초를 조심해야 하는 곳이다. Inside Passage는 워싱턴주의 시애틀과 브리티시 콜롬비아주의 밴쿠버에서 알래스카 Skagway에 이르는 유사한 항로를 제공한다. 또 하나의 암초로부터 보호된 항로는 마젤란해협의 북쪽 800km에 걸쳐 뻗어있다.

부정확한 피오르

영어와 스칸디나비아어 간의 사용법의 차이는 피오르란 말의 사용에 혼동을 가져왔다. 스칸디나비아어에서 분명히 피오르인 수역이 영어에서는 피오르로 여기지 않는다, 유사하게 스칸디나비아어 의미로 분명히 피오르드가 아닌 수역이 피오르로 불리거나 추정되어졌다. 이런 혼동된 사용의 사례는 다음과 같다.

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의 코토르(Kotor)만은 일부에서 피오르로 추측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물에 잠긴 강 협곡이나 리아스식 해안이다. 유사하게, 빙하침식에 의해 피오르로 깎인 것이 아니라 Pazinčica강에 의해 리아스식 해안 형태를 가진 크로아티아 이스트리아(Istria)반도의 림(Lim)만은 때로 림피오르라 불리었다. 크로아티아인들은 Limski kanal이라 부르는데 이는 분명히 영어의 피오르와 동등하게 번역되지 않는다.

덴마크 북쪽의 림피오르드는 스칸디나비아어의 의미론 피오르지만, 영어의 의미론 피오르가 아니다. 영어에서 이 곳을 벤쉬텔튀(Vendysyseel-Thy/Jutlandic Island)가 윌란(Jylland/ Jutland, 유틀란트)반도와 분리되어 있으므로 해협으로 부른다.

한편 미국 뉴잉글랜드지역 해안의 피오르 같은 만을 때로 피아르들(Fiards)”로 나타내지만, 뉴 잉글랜드에서 빙하작용으로 형성된 피오르와 같은 특징은 오직 메인주의 Somes Sound뿐이다.

스칸디나비아어의 의미로 피오르인 노르웨이 북부의 핀마르크(Finnmark)의 피오르는 일부에서 부정확한 피오르로 여긴다. 비록 빙하작용으로 형성되었지만, 형성 당시 빙하덩어리가 고지대를 덮을 만큼 충분히 깊었기 때문에 보다 남쪽의 노르웨이 피오르들의 전통적인 양쪽이 가파른 계곡의 특징이 핀마르크 피오르들에는 거의 없다.

멕시코의 아까풀꼬(Acapulco)의 깔랑퀴(Calanque)의 유명한 절벽잠수 지역이 있는 도시 서쪽의 좁은 바위 후미는 피오르드와 같은 존재로 도시의 여행기에 묘사되어 있다.

담수 피오르드

노르웨이의 명명 관습에 따라 출구를 막고 있는 단퇴석들이 있는 오랜 빙하작용으로 깎인 계곡에 형성된 노르웨이의 일부 담수 호수들은 피오르로 불린다. 노르웨이 이외에 뉴질랜드의 테 아나오(Te Anau)호수 서쪽의 세 개 만은 북, 중, 남 피오르로 명명되었다. 보다 큰 호수 중 또 다른 담수 피오르는 캐나다 중남부 온타리오주 휴런(Huron)호의 조지아만의 북동쪽 해안에 위치한 베이 파인(Baie Fine)이다. 캐나다 동북부 뉴펀드랜드주의 그로스 몬(Gros Morne)국립공원의 서천못(Western Brook Pond)은 종종 피오르로 설명되지만, 사실 바다에서 떨어진 담수호로 영어의 의미로 피오르는 아니다.

이런 호수들은 때로 피오르 호수들로 불리었다. 캐나다 중남부 브리티시 콜롬비아주 오카나간(Okanagan)호가 1962년 이렇게 묘사된 최초의 북미 호수이다. 기반암이 해수면 아래 650m까지 침식되어 주변지역의 지형보다 2,000m 아래에 위치하여 그랜드캐니언보다 깊다. 피오르드 호수들은 통상 Coast Mountains와 Cascade Range의 내륙 초지 위에 있는데, 알려진 곳이 Chelan, Seton, Chilko 그리고 Atlin호 이고, 콜롬비아강 분지의 다른 것들도 역시 특성상 피오르 같고, 같은 방식의 빙하활동에 의해 형성되었다. 브리티시 콜롬비아 연안에 속한 유명한 피오르 호수는 강 후미의 담수가 확장된 오위키노(Owikeno)호 이다. 또 다른 지역의 유명한 피오르 호수들은 이탈리아 북부와 스위스 남부의 코모(Como)호와 이웃한 것들이다.

위치

피오르들이 형성된 주요 산악지역은 중위도(남북위: 23°26'22" - 66°33'39") 고위도 지역이고, 북위80°에 이르는 고위도는 빙하기 동안에 많은 계곡빙하가 보다 낮은 해수면쪽으로 뻗어 있었다. 서쪽의 해양굴곡이 많은 산악지역에 가장 발달한 피오르들은 빙하들을 제공하기 위한 충분한 강설량이 공급되던 산악지역 전체가 융기한 것이다. 가장 많이 언급되는 피오르 해안은 유럽 서부해안, Puget Sound에서 알래스카에 이르는 북미 서부, 뉴질랜드 서부 그리고 남미 서부와 호주 남부 태즈매니아섬 남서부이다. 태즈매니아에는 비록 빙하작용은 아니지만 때로 여름에도 눈으로 덮인 남쪽지구에 1000m에 이르는 산들로 둘러 쌓인 수많은 작은 피오르들이 있다. 이들 피오르들은 과거 빙하들이 멋지게 바다를 통과하면서 형성되었다.

소그네피오르(Sognefjord, 송네)

소그네피오르는 노르웨이의 가장 긴 피오르이고 그린란드의 스코레스뮈순(Scoresby Sund, 스코스비 선드: 350km)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긴 피오르다. 쏘군노피오라나(Sogn og Fjordane)에 위치한 소그네피오르는 Skjolden란 작은 마을이 있는 내륙으로 205km가 뻗어있다. 소그네피오르는 쏘군(Sogn)이라는 전통마을에서 따왔다. 안쪽의 내뢰이(Nærøy)피오르는 유네스코(UNESCO)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지리

소그네피오르의 최대 수심은 1,308m에 이르고 입구근처의 바닥에는 해저에서 100m 정도의 턱이 갑자기 나타난다. 소그네피오르의 본류의 평균 폭은 4.5km이다. 피오르 주변의 절벽은 수면에서 1,000m 이상으로 가파르게 솟아 잇다.

피오르 내부에는 남동쪽에 해발 2,000m 이상의 산맥이 집중되어 있고 유럽의 가장 큰 빙하 요스테달스브린(Jostedalsbreen)으로 덮여 있다. 이런 이유로 피오르 내부 끝과 지류들의 기후는 외부 해안선 같이 습하지 않다. 안쪽 끝 주변에는 노르웨이의 유명한 통널을 이용한 목조교회 3곳이 남아 있다.

소그네피오르의 가장 안쪽을 러스트라(Lustra)라고 부르는 데, Skjolden에서는 요툰헤이멘(Jotunheimen)국립공원으로 접근할 수 있다.

사회

선박은 피오르와 지류의 마을들을 연결해준다. 소그네피오르의 지류인 내뢰이(Nærøy)피오르에 있는 구드방근(Gudvangen)은 손상되지 않은 빼어난 경관과 폭 300m인 가장 협소한 지점으로 유명하다. 내뢰이피오르 유네스코 자연유산으로 등록되었다. Flåm에서 기차는 세상에서 가장 가파른 철로를 자력으로 오르는데, 20km 거리에 864m를 올라 Myrdal에 도착한다.

소그네피오르 위로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긴 4597m 간격의 전력선이 설치되어 있다.

 

하르당에르(Hardanger, 하르당게르)피오르

179km의 하르당에르피오르는 노르웨이 호르달란(Hordaland)주에 위치하는 세계 3, 노르웨이 2대 피오르다.

하르당에르피오르는 바르근(Bergen, 베르겐) 인근 남쪽의 대서양에서 시작된다. 이곳에서 하르당에르피오르는 하르당에르비다(Hardangervidda) 대고원까지 북동방향으로 관통되어 있다. 가장 긴 지류는 본류에서 약 50km 남쪽을 가르는 쇠르(Sørf)피오르이다. 최대수심은 피오르 중간의 노르하임순(Norheimsund) 인근의 800m이다.

1만년 전 스칸디나비아 반도는 거대한 빙하가 녹기 시작하자 융기를 시작했다. 계곡의 낮은 부분은 침수되었고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피오르가 형성되었다. 계곡은 원래 빙하침식뿐만 아니라 높은 압력의 녹은 물이 얼음 바로 밑을 밀어내면서 생성되었다.

하르당에르피오르에 속하는 Folgefonn 반도에는 노르웨이에서 3번째로 큰 빙하가 있다. 3 지역으로 이루어진 Folgefonn 빙하는 220㎢를 덮고 있고 2005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바이킹의 역사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피오르의 역사는 주변 산들에서 사냥하던 시기와 그 뒤의 오늘날 노르웨이의 과수원이 된 비옥한 토지에서 농사짓던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후에 이곳은 노르웨이에 수많은 관광객이 쇄도하는 발상지가 되었고, 1875년 토마스 쿡(Thomas Cook)은 독특한 자연, 빙하 그리고 거대한 폭포들이 특징인 하르당에르피오르에 런던에서 주간 순항선 출항을 시작했다. 이후로 수많은 주요폭포들은 옷다(Odda)와 같은 피오르 마을들에 산업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오늘날 하르당에르피오르는 관광산업의 르네상스의 무대이며 여행객들을 위한 새로운 기반시설들은 다시 한번 피오르에 속한 지역사회를 위한 산업이 되고 있다. 하르당에르피오르는 양어에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 양어장들은 매년 4만 톤이 넘는 연어와 무지개 송어를 생산하며 하르당에르피오르를 세계4대 양어지역의 하나로 만들었다.

 

게이랑에르(Geiranger, 게이랑게르)피오르

게이랑에르는 뫼레오그롬스달(Møre og Romsdal)주의 최남단에 위치한 순뫼레(Sunnmøre)지역의 피오르이다. 게이랑게르는 15km 길이로 스토르(Stor)피오르의 지류이다. 피오르의 꼭대기에는 게이랑게르란 작은 마을이 있다.

이 피오르는 노르웨이 여행자들이 가장 많이 방문한 곳의 하나이며 내뢰이피오르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2005년 이후 피오르를 가로지르는 전력선을 건설하기 위한 계획이 논쟁이 되면서 이런 상황은 위협 받고 있다. 게이랑게르피오르는 피오르 안을 손상시킬 수 있는 Åkerneset 산으로부터 지속적인 위협을 받았다. 이 산의 붕괴는 게이랑게르와 10분 거리의 Hellesylt을 포함한 근처의 몇몇 지역을 강타할 쓰나미를 일으킬 것이다.

피오르드의 측면들을 따라서 버려진 농장들이 다소 있다. 일부 복구가 Strofjordens venner 협회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들 중 가장 많이 방문하는 곳이 Skageflå, Knivsflå, 그리고 Blomberg이다. Skageflå는 게이랑게르에서 도보로 오를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보트 유람을 해야 한다. 이 피오르는 몇몇 인상적인 폭포들이 있다. 관람여행을 위한 2층의 자동차여객선은 Fjord1이 제공한다. 이 배는 게이랑게르 그리고 Hellesylt의 작은 도시들 사이의 피오르를 따라서 먼 거리를 이동한다.

가장 유명한 두 개의 폭포는 7남매와 Wooer라 부르는 구혼자다. 두 폭포는 피오르를 가로질러 각기 마주보고 있고, 구혼자는 반대편의 7남매에게 구혼을 시도하고 있다.

또 하나의 폭포 Bridal Veil은 하나의 바위 끝 위에서 섬세하게 떨어져서 붙여진 이름으로 태양을 마주하고 보면 바위들 위로 얇은 장막의 형태로 보인다.

뤼세피오르(Lysefjord)

뤼세피오르는 노르웨이 남서쪽 Forsand에 위치해 있다. 뤼세는 빛이란 의미로 피오르 양쪽의 밝게 채색된 화강암 바위들에서 따왔다고 한다. 뤼세피오르는 42km 길이에 수면까지 1,000m가 넘게 거의 수직으로 떨어지는 암벽이 특징이다. 황폐한 지역인 뤼세피오르는 주민수가 작고 피오르 끝에 마주보고 위치한 Forsand Lysecotn 두 개의 마을만 있다. 피오르를 따라서 살거나 살았던 사람들은 산들이 길로 쓰기에 너무 가팔라서 선박을 이용해 고향을 떠날 수 있다.

멀리 동쪽 끝에 위치한 Lysecotn에는 근처의 산 내부에 지어진 수력발전소 근무자들이 주로 거주한다. 이들 발전소들은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전기를 공급한다. 900m에 이르는 특별도로는 27고갯길을 통해서 Lysebotn과 외부세계를 연결해준다.

 뤼세피오르는 인기 있는 관광지이고 근처의 스타방에르와 피오르 전체를 여행하는 순항선들의 하루 여행코스이다. 피오르 자체의 독특한 경관 외에 두 지역이 여행객들에게 인기가 있다. 600m를 수직으로 떨어지는 곳 위에 위치한 프레이케스톨렌(Preikestolen: pulpit rock, 강단)바위는 피오르에서 볼 수 있지만, 위에서 볼 때 보다 감동적이다. 피오르 끝에 있는 키르아그(Kjerag) 산은 더욱 눈부신 급경사를 가지고 있어서 하이킹 족들에게 인기가 있다.

 

피오르의 길이와 협소함 뿐만 아니라 산의 높이 같이 깊은 장소도 있다. 스타방에르근처의 바다와 만나는 지역의 깊이는 13m 이지만, Prekestolen 아래쪽의 피오르 깊이는 400m 이다.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Victor Hugo: 1802-1885)는 1866년 이곳을 방문한 후 그 경관을 칭찬하면서 Toilers of the Sea란 소설에서 시로 읊기를 뤼세피오르는 해양암석 중 가장 경이롭다고 했다. BASE 점퍼(Jumper)들은 이곳에서 점프를 하려면 법적으로 허가를 받아야 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