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음악과 시 사진,그리고../지구촌 풍경

양자강(揚子江) 장강삽협(長江三峽: Changjiang Sanxia, 창장산샤)

by 임실사랑 2009. 6. 4.

 

장강(長江: Changjiang, 이하 창지앙)은 양자강(揚子江: Yangtzejiang, 이하 양쯔지앙 "tze"는 일본식, 중국식은 "zi")의 다른 이름이다.

 

 

삼협(三峽: Sanxia, 이하 싼샤)은 양쯔장의 중류 120km 길이의 협곡 경관지역을 말하는 표현이다. 싼샤는 경관으로 가장 유명하지만, 역사와 문화적으로도 중요한 지역이다. 중국 화폐 10위안의 뒤쪽에 서쪽 끝부분이 도안되어 있다.

 

 

싼샤는 중경(重慶/中庆: Chongging)자치구의 봉절현(奉節縣: Fengjie) 호북성(湖北省: Hubei) 의창(宜昌: Yichang)시 구간의 양쯔장을 따라서 위치한다. 산샤지역은 삼협패[三峽: Sanxiaba, 이하 싼샤빠)로 인해 경관이 바뀌면서 국제적인 관심을 끌고 있는 지역이다. 

 

싼샤(三峽)지역은 다음과 같다.

 

()

길이(km)

구역

구당협(瞿塘峡: Qutangxia)

8

봉절현[奉節()] 백제성(白帝城) – 대계(大溪)

무협(巫峽: Wuxia)

45

무산(巫山) - 파동현(巴東縣) 관도구(官渡口)

서릉협(西陵峽:Xilingxia)

66

자귀(姉歸/姊归) – 의창(宜昌) 남진관(南津關)

 

구당협(瞿塘峡: Qutangxia, 이하 취탕샤)

 

취탕샤(瞿塘峡)는 싼샤 중에서 가장 짧고도 놀라운 광경을 가진 곳이다. 북쪽의 적갑산(赤甲山: Chijiashan)과 남쪽의 백염산(白鹽()山: Baiyanshan)사이의 백제성(白帝城: Baidisheng)계곡을 직접 가로질러 흘러간다. 이 산들 사이의 강줄기를 기문(夔門: Kuimen, 조심할 기)이라 하여 싼샤의 첫 번째 관문이다. 취탕샤는 8km로 짧지만 산샤 중에서 최고의 협곡이다. 가장 넓은 곳이 150m 인데, 각각의 산의 높이는 1,200m에 이른다. 8km의 굽이진 높은 산들과 좁고 깊은 협곡의 조화는 놀라운 광경을 만들어내 취탕샤를 싼샤 중 최고로 여기곤 한다  

 

 

백제성(白帝城: Baidisheng, 바이디창)

 

백제성은 중경(重慶/中庆: Chongging)자치구의 봉절현(奉節縣: Fengjie)에서 동쪽으로 8km 떨어진 양쯔장 북쪽기슭에 위치한 고대 도시이다. 백제성은 황제의 상징인 백룡(白龍)이 출현했다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과 파()를 정벌한 군벌 공손술(公孫述: Gongsun Shu, AD ?-36)은 하늘이 돕는다고 여겨 천자(天子: Chengja)라 칭했다. 그는 도시를 세우고 백제성이라 칭했다.

 

 

싼샤빠로 인해 백제성은 작은 섬이 되었지만 섬에 연결된 다리나 뱃길로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삼국시대(220-280) 유비(劉備) 현덕(玄徳)은 백제성에서 촉한(蜀漢)을 세워 제위에 올랐다. 후에, ()국에 패하여 이곳에서 병사하였다. 이곳엔 유비와 제갈량(諸葛亮: Zhuge Liang)의 묘()가 있다. 또한 이곳은 이백(李白: Libai)과 두보(杜甫: Dufu) 등의 많은 시에서 등장하는 소재로도 유명하다.

 

 

이백의 칠언절구 早發白帝城(조발백제성)”

 

朝辭白帝彩雲間(조사백제채운간) 아침에 자운(紫雲)사이 백제성에 하직하고

千里江陵一日還(천리강릉일일환) 천리 강릉에 하루 만에 돌아왔다.

兩岸猿聲啼不住(양안월성제부주) 양쪽 기슭의 원숭이 울음 소리 그치지 않고

輕舟已過萬重山(경주이과만중산) 가볍고 빠른 배는 이미 첩첩산을 돌아 왔다.

 

야랑(夜郞:貴州)으로 유배를 떠난 도중에서 곽자의(郭子義)에 의하여 구명될 때 지은 시라고 한다(59)

 

 

싼샤빠로 사라진 취탕샤 풍경

 

비록 취탕샤가 협곡 중에서 상류에 위치하지만, 싼샤빠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취탕샤에서 가장 유명하고 역사적으로 중요한 지역들이 수면아래로 사라졌다.

 

 

분벽장(分壁墻: The Chalk Wall)

 

취탕샤 입구 기문(夔門) 근처의 남쪽의 하얀 절벽에 있던 분벽장은 송조(宋朝:960-1279)이후 유명 서예가들의 작품 1000개가 다양한 크기와 형태로 바위에 새겨져 있던 곳이다  

 

 

고잔도(古棧道: The Ancient Pathway)

 

 

이 좁은 통로는 서한(西漢: BC 206 – AD 24)때부터 만들기 시작해서 20세기까지 유지와 개량이 지속되었다. 원래의 목적은 상류로 배를 이동시키던 사람들의 통행로였다. 초창기 배들은 키잡이 기능의 노만을 사용해 하류로 내려갔다.

 

 

하지만 빠른 물살 때문에 노를 저어서 상류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이렇게 로프를 이용해 배를 끌고 상류로 이동했다. 배를 끌고 가기 위해서는 가파른 절벽에 걸을 수 있는 통로가 필요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천산망(天山網)에서 이와 같은 모습을 볼 수 있다.

 

한편, 통행로는 확장되고 개량되었는데, 짐꾼들의 통행을 위해 산 위에 개설된 잔도는 싼샤빠가 완성된 오늘날에도 볼 수 있다.  

 

 

맹량제(孟良梯: The Meng Liang Stairway)

 

취탕샤 남쪽 백염산(白鹽()山: Baiyanshan) 절벽에는 직사각형모양의 구멍이 절벽에 연이어 뚫어져 있다.  이 구멍들은 대부분 1m 간격의 1m 깊이로 뚫어져 있다. 이 구멍들은 산꼭대기를 향해 Z자 형태의 지그재그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를 맹량제라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이 구멍들은 송조(宋朝:960-1279)의 군인 맹량(孟良: Mengliang)이 뚫었다고 한다. 양계업(楊繼業: Yangjiye)장군의 부하였던 맹량은 백염산 정상에 묻혔다. 맹량은 양계업의 생존자들을 찾아서 고향에 돌아가 묻히기를 원했다. 밤에 이 통로를 만들었다고 한다. 산 정상의 어떤 수도승이 그를 보고 다가와 수탉 같이 울었다. 맹량은 아침이 된 줄 알고 추적을 피하기 위해 작업을 중지했다.

 

 

이와 같은 구멍들은 싼샤지역에서 통로로 이용되었다. 구멍에 기둥을 박아넣고 다른 통로를 뚫거나 기둥에서 기둥 사이를 이동할 수 있었다. 역사가들은 이 특별한 구멍을 뚫은 이유와 왜 절벽으로 오르려고 했는지를 아직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 통로가 강에서 사람들이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을 거라고 추정한다  

 

 

비슷한 구멍들은 무산(巫山: Wushan)과 대령하(大寧河: Daning)의 소삼협(小三峽)에서 볼 수 있다. 무산의 여행안내소는 이런 구멍에 설치한 기둥에 위치하고 있어서 여행자들은 그 용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수몰 이전 사진 링크: http://tong.nate.com/jss40sa/40322826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