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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향 임실/임실군 자료

[스크랩] 임실군 전설

by 임실사랑 2008. 12. 20.

임실군 전설

동자바위

지은이 및 출처 : 임대택(남, 임실군 덕치면 천담리 천담부락)

덕치면 천담리 천담 마을에서 동북쪽으로 약 500m지점에 석불처럼 생긴 동자바위가 서 있는데 그 모습이 천진스러워 마치 시골의 나무꾼을 연상케 하여 친근감이 가지만 그 바위에 얽힌 전설이 지금도 듣는 이의 마음을 애처롭게 한다.
오랜 옛날 천담 마을에는 수렵을 생업으로 살아가는 총각이 있었다. 매일같이 산으로 들로 짐승을 찾아 헤매이며 사냥에 열중해 있었는데 하루는 뒷산에서 꿩을 발견하고 화살을 날려 보냈는데 그 화살이 꿩의 꼬리를 꿰 뚫은 채 두꺼비 나루를 건너 마침 산기슭에서 나물을 캐던 처녀 앞에 떨어져 죽었다.


꿩을 뒤 쫓아 두꺼비 나루를 건너온 총각은 꿩을 찾아 두리번거리다 처녀 앞에 떨어져 있는 꿩을 발견하고 꿩을 집어 올리는 순간 파랗게 질려있는 처녀를 보고 얼어 붙은 듯 그 자리에 서고 말았다.
처녀의 빼어난 미모와 자태는 선녀가 하강한 듯 그 둘레가 훤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 처녀는 돌무덤 마을에 살면서 산채를 캐고 약초를 캐며 살아 가는 처녀였는데 둘이 서로 눈길이 마주치는 순간 불길 같은 연정을 느꼈으며 그날부터 둘은 두꺼비 나루를 사이에 두고 서로 그리움을 불태우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냥꾼 총각이 처녀를 만나기 위하여 두꺼비 나루를 건너려고 할 때에 갑자기 맑은 하늘에 뇌성벽력이 일어나고 일진광풍이 일어 도저히 두꺼비나루를 건널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상사의 정은 점점 더하고 자꾸만 야위어가는 두 사람은 끝내 사랑을 이루지 못 한 채 죽고 말았다.
총각과 처녀가 죽은 날 밤에 천지가 진동하고 광풍이 일어 마을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밤을 뜬 눈으로 세웠는데 날이 밝자 총각이 살던 마을 앞에 생시의 총각모습을 닮은 동자바위가 생겨났고 두꺼비나루 건너에는 동자바위와 마주바라다 보이는 곳에 여자를 상징하는 바위가 생겨 났다.


그 후 부부간에 공방살이 들 때에는 남자가 여자를 싫어할 경우 동자바위에서 여자가 남자를 싫어할 때에는 여인바위에서 돌을 쪼아다가 가루를 만들어 상대방 몰래 상대방의 음식물에 섞어 먹이면 공방살이 풀린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어 공방살이 낀 부녀들은 돌을 쪼아가는 촌극이 근래까지 행해지고 있다.


그러나 도로 확장공사로 여인바위는 흔적이 없어지고 동자바위 만이 홀로 처녀를 그리워하는 듯 두꺼비나루 건너편을 바라보며 외로이 서있다.

두복룡소(斗福龍沼)

지은이 및 출처 : 홍대성(남, 임실군 청웅면 옥전리 명동부락)

청웅면 두복리 입구 백련산(白蓮山)에서 흐르는 물이 모였다가 구고(九皐)천으로 내려오면 주위의 위와 아래와 약 1천m 거리와 40도 경사에 큰 바위가 깔려 있어 흡사 작은 폭포를 연상케 한다.
여기에서 흐르는 물소리는 사백 5백 미터에서 들리며 여름에는 이곳은 지나가는 사람들이 의례 쉬면서 더위를 식힌다.
또한 이 용소는 극심한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을 정도로 항상 물이 고여 있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이 용소는 용이 이곳에서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여 용소(龍沼)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용이 하늘로 올라가면서 마지막 꼬리로 바위를 치는 바람에 소의 옆에는 평평한 바위가 직경 2m주위가 움푹하게 접시처럼 파져 있는 흔적이 있다.
두복 용소의 깊이는 실 꾸러미에 돌을 메어 넣으면 3꾸러미가 들어가서 갈 담 돌다리 밑으로 나온다(약 5km)는 말이 있을 정도로 깊다고 전해지고 있다.


옛날에는 여름에 극심한 가뭄이 들면 전 주민들이 이곳에 와서 제물을 차려 놓고 돼지를 잡아 피를 근처에 뿌려 더럽히고 아녀자들이 옷을 벗고 뛰어 다니면서 하늘에 치부를 보이면 소나기가 내려 더럽혀진 자리를 깨끗이 씻어줄 정도로 비를 내려주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후 부터는 한발이 심하면 기우제를 이곳 용소에서 지내면 의례히 비가 많이 왔다고 전해져 오고 있다
.

말바위

지은이 및 출처 : 최우성(남, 임실군 관촌면 황산리)

관촌면 복홍리 횡산 마을에서 북쪽으로 약 1km쯤 산길을 타고 오르다 보면 마치 말을 타고 있는 듯한 바위가 길가에 서있다.
이 바위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옛날 이곳은 갈라진 바위 골이라 하여 매우 순박한 농부들이 살고 있었다.
이 마을에는 천하일색의 처녀가 혼기를 앞두고 부모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그런데 옆 마을에는 천하명궁의 소리를 듣는 건장한 총각이 살았는데 그 총각의 활 솜씨는 멧돼지 호랑이는 물론 날아가는 독수리도 떨어뜨릴 정도였다.
어느 날 이 총각이 사냥을 하러 길을 가다가 물을 긷고 있는 천하일색의 그 처녀를 보고는 그만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매일 이곳 갈라진 바위골 주위를 맴돌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깊은 야밤에 오랑캐가 마을을 습격하여 재물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등의 만행을 저지르고 돌아가다 겁에 질려 있는 처녀를 발견하자 오랑캐의 대장은 그만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해 처녀를 말에 태워 달아나 버렸다.
한편 이런 소식을 접한 총각은 급히 말을 몰아 마을에 도착하니 이미 마을은 불길에 휩싸이고 오랑캐는 이미 십리 밖의 산등성이를 오르고 있었다.


이에 다급한 청년은 도저히 화살이 날아갈 수 없는 길이지만 활시위를 당겨 2개의 화살을 날리니 놀랍게도 그 화살이 하나는 적장의 뒷덜미를 하나는 말에 명중하였다.
청년이 마을 사람들과 함께 달려가 보니 적장과 말은 즉사하고 처녀는 혼절을 하여 쓰러져 있었다.
그 후 이 처녀를 아내로 맞은 청년은 그녀와 함께 적장과 말이 즉사한 그곳에 가보니 적장과 말의 시신은 오간 데 없고 말의 형상을 한 바위만 서있었다.


두 사람은 바위 옆에 묘를 써주고 해마다 제를 지내 비록 적이지만 고인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한다.

베틀(織機)바위

지은이 및 출처 : 한중섭(남, 임실군 삼계면 산수리 동산부락)

지금부터 약 4백 년 전 삼계면 용가매(지금의 용동)에 의좋은 부부가 살았다 한다.
그러나 이들 부부가 혼인한지 3~4년이 지나도록 자식이 없어 걱정하여 오던 중 베틀바위에 돌을 던져 돌이 바위 위에서 떨어지지 않으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하루는 베틀바위 아래에서 돌을 던져 보았으나 돌은 바로 떨어지고 또 던지면 또 떨어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 후 이들 부부는 날이면 날마다 아들을 낳을 결심으로 돌을 던져보았으나 돌은 좀처럼 바위 위엔 떨어지지 않았다.


임 씨 부인은 언젠가는 꼭 돌을 던지며 틀림없이 바위 위에 떨어지리라 생각하고 베틀까지 가지고 와서 베를 짜다가 틈틈이 돌을 던졌다.
임 씨 부인은 낮에는 말할 것도 없이 밤에도 베를 짜야만 끼니를 이을 수 있었지만 아들을 얻으려는 결심으로 돌을 던지는 일 또한 게을리 할 수 없었다.
이러한 때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당시 왜장 '우키다 히데이'는 자기의 부하 5명을 행상으로 가장 시켜 남원 해곡 운봉 지방의 우리 사정을 염탐케 하였다.
이들 왜병들이 이 지방에까지 와서 깊은 산속에서 베 짜는 소리를 듣고 주위를 살펴보니 어여쁜 여인이 혼자 베를 짜고 있는 것을 보고는 농락하려 했다.
이에 임 씨 부인은 크게 왜병들을 호통쳐 물러나게 했다.
임 씨 부인은 왜병들이 떠나간 후 관가를 찾아가
「왜병들이 남원 고을을 염탐하려 남쪽으로 내려갔다」
는 이야기를 전해주니 관가에서는 포졸을 풀어 왜병들을 체포하여 무사히 남원 고을의 위기를 모면하였다 한다.


그러나 왜장 '우키타 히데이'는 후에 이 사실을 알고 이 고을을 공략한 후 임 씨 부인을 참혹하게 죽이고 말았다.
그 후 4백년이 지난 오늘 이 베틀바위는 피서지로도 유명하여 피서를 하다가 비가 오면 바위 속으로 비를 피할 수 있는데 이 속에는 장정 30명쯤 들어갈 수 있다 한다.

사선대

지은이 및 출처 : 박우현(남, 임실군 관촌면 관촌리)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마이산(馬耳山)의 두 신선과 운주산(임실면)의 두 신선이 하루는 이곳 관촌의 오원강 기슭에 모여 놀다가 병풍처럼 아름다운 주위의 풍경에 취하여 혹은 대에 오르기도 하고 혹은 바위 위를 거닐기도 하면서 맑은 물에 목욕하고 즐기더니 까마귀 떼가 날아와 함께 어울리고 이때 홀연히 네 명의 선녀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네 사람의 학발 신선들을 호위하여 사라졌다.


이후로 해마다 이맘때면 그들 선남선녀들이 놀았다 하며 그리하여 이곳을 사선대라 하고 까마귀가 놀던 이강을 오원강이라 불렀다 한다.
또 신선이 놀던 바위를 놀음바위라 부르고 있으며 검은 절벽사이의 이름 모를 꽃들, 그 밑을 흐르는 강물이 그야말로 선경을 이루어 있다.


또 일설에 의하면 정조 때 관촌면 주천리의 상산 이 씨 이달효는 아호를 호산이라 하고 문장이 뛰어나 《호산집》일책을 펴내기도 했는데 그때 호남의 명사들과 널리 사귀어 임실 현감 이도재와도 막연한 사이였다.
이때 이도재 현감은 저주 판관과 남원 부사 호산(湖山) 이달효 등과 같이 넷이서 항상 오원강 위에 배를 띄워 놀고 또 대의 명승을 자주 찾아왔다.
이들 네 사람은 서로 나이도 비슷하여 이미 노년에 접어 들고 이곳에 모일 때는 언제나 관복을 벗고 평복을 하였으므로 마치 네 사람의 신선과도 같아 어느덧 그들이 놀던 대를 사선대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상사암과 월추암의 싸움

지은이 및 출처 : 신윤철(남, 임실군 신덕면 수천리 수천부락)

산덕면 수천리 산 1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상사암(商師岩)은 아주 오랜 옛날 상사암과 월추암(月秋岩) 사이에 있는 치마산(馳馬山)을 차지하고자 월추암과 협상을 했으나 의견이 서로 엇갈려 싸움이 일어났다.
먼저 월추암이 공격을 하여 상사암을 칼로 세 번 내리쳐서 상사암의 처인 작은 샘배바위(小商岩)의 목을 베어 땅에 구르게 하니 샘배바위는 상사암 밑에 떨어져 조각바위가 되었다 한다.
이 때 상사암은 월추암의 급습으로 몸체에 세 줄기의 칼자국이 선명하게 지금도 남아있다.


이 때 화가 난 상사암 역시 커다란 창으로 월추암을 공격하여 두 군데다 상처를 입혀 움푹하게 만들어 놓았다.
결국 상사암은 이 싸움에서 승리하여 치마산을 얻었고 장군으로서의 높은 기상을 발휘하여 이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지만 처인 소상암을 잃고 슬픔을 가눌 수 없어 크게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이 조각바위에 떨어져 웅덩이를 이루었는데 아무리 가뭄이 심해도 이 곳엔 물이 마르지 않는다 한다.
한 편 월추암은 상사암의 공격으로 입은 상처로 인하여 유혈이 낭자하여 두 개의 옹달샘엔 빨간 선혈이 고여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사람이 이 옹달샘의 물을 마시고 소변을 보면 소변이 피가 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한여름 가뭄이 극심할 때 상사암과 월추암의 서러움을 달래주면 여기에 짙은 회색빛 먹구름이 몰려와 소나기를 내리게 했다는 이야기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석불

지은이 및 출처 : 박양례(여, 임실군 둔남면 관월리 관월부락)

둔남면 관월 부락 뒤에는 약 3백년 전부터 석불이 우뚝 서 마을의 수호신처럼 이 마을을 굽어보며 지키고 있다.
이 석불의 유래를 보면 한 아낙네가 어느 날 뒤쪽 산을 바라보니 큰 집채만한 바위덩어리가 걸어 내려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저것 좀 보라고 큰 소리를 치니 이 아낙네의 외치는 소리를 들은 바위는 그만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서 버렸다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가 석불인 것을 알고 난 후부터는 서로 불공을 드리고 관리에 정성을 쏟아오고 있는데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석불이 마을 뒷산쪽에 안좌하지 않고 마을 앞까지 나와 안좌(정좌)했더라면 이 마을이 더욱 융성하고 마을 주민들의 자손이 오래도록 부귀영화를 누렸을 것이라 한다.


그 후 1백여 년이나 눈, 비, 바람을 맞고 외로이 서있는 석불을 이 마을 최경태씨가 움막같은 집을 만들어 주었으며 다시 약 80년 전 진안 마이산에 거주한 고 이갑용 옹의 꿈에 이 석불이 나타나
「내가 옷을 벗고 있으니 집을 지어 달라」
는 부탁을 받아 다시 개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용연의 원귀

지은이 및 출처 : 양만순(남, 임실군 임실읍 장재리)

용연은 용소라고도 부르며 임실읍 서남쪽 1km 자리에 있는 정월리의 그 하류에 석교천이 흐르고 있다.
주위는 작은 야산들로 둘러 쌓여 있으며 규모는 작지만 깊이는 헤아릴 수 없다고 한다.
옛 노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 용연에서는 해마다 선남선녀인 젊은이들이 익사했는데 이것은 물이 깨끗하고 시원하므로 여름에 목욕하는 사람들이 많아 이들이 희생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한 희생이 매년 되풀이 되는 것을 이상히 여긴 마을 주민들이 관가에 진정하자 관가에서는 원귀를 풀기 위해 진혼제를 지냈다.
용연을 중앙에 두고 양쪽 제방에 기둥을 세워 튼튼한 동아줄을 이어 줄타기를 하고 풍악을 올리고 관기가 동원되어 노래와 춤을 추어 흥을 돋우니 장관을 이루었다 한다.
이후로는 용연에 사람이 빠져 죽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의견비

지은이 및 출처 : 심병국(남, 임실군 둔남면 오수리)

오수(獒樹)의 지명이 전해주듯 이 곳은 충심 있는 개의 이야기로 유명하고 이야기는 교과서에까지 수록될 정도이다.


지금도 오수리 시장 내 원산동 공원에는 의견비(義犬碑)가 서있어 주인을 위해 죽어간 개의 충혼을 위로하고 있다.
지금부터 1천 여 년 전 신라시대 거령헌(오늘날의 지사면 영천리)에 김개인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개 한 마리를 기르고 있었는데 개를 몹시 사랑하였으며 어디를 다닐 때면 항상 데리고 다녔다.
그런데 어느 해 이른 봄, 그는 개를 데리고 장이 선 오수로 놀러 나갔다. 그런데 그는 너무나 술을 좋아하여 친구들과 어울리다 보니 날이 저물었다.
그는 몹시 취한 채 개를 데리고 집으로 가다가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그만 잔디밭에 쓰러져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김개인의 개는 주인이 잠에서 깨어나기만 기다리며 쪼그리고 앉아 주위를 살피면서 지키고 있었다.
헌데 때마침 부근에서는 들불이 일어나 가까이에 번져오고 있었다.
개는 주인을 입으로 물고 밀면서 깨우려고 온갖 지혜를 다 짜냈다. 그러나 이런 안타까운 일이 또 있으랴! 한번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주인은 주위의 불길도 아랑곳 없이 깨어날 줄 몰랐다.


뜨거운 불길이 점점 주인 옆까지 번져오자 개는 불을 끌 수가 없음을 깨닫고 가까운 시냇가로 쏜살같이 달려가 온몸에 물을 흠뻑 적셔와 잔디 위에 구르기 시작했다.
수십 수백 번을 이렇게 왔다 갔다 하여 잔디는 물에 젖고 싸늘함을 느낀 주인은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그러나 힘이 쑥 빠진 개는 주인의 옆에 쓰러져 죽고 말았다.
주위를 둘러보고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김개인은 몸을 바쳐 자기를 구해준 개를 부여안고 크게 슬퍼하였다. 주인은 개를 장사 지낸 뒤 이 곳을 잊지 않기 위해 개의 무덤 앞에 평소 자기가 지니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두고 이 자리를 떠났다.


얼마 후 지팡이에 싹이 돋기 시작하더니 하늘을 찌를 듯한 느티나무가 되었고 그때부터 그 나무를 이름 지어 오수라 했으며 이 고장의 이름까지 되었다.


그 개의 충정을 길이 기념하기 위해 건립했던 의견비는 문자마저 마멸되어 버렸으며 지금의 의견비는 1955년 4월 8일 다시 세운 것이다.
비록 한낱 미천한 개이지만 불에 타죽기 직전에 주인을 구하고 자기의 생명을 버렸다는 의견이야기는 교육적인 면에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되어야 하겠고, 오늘날 같이 물질문명의 발달로 도덕적 윤리관념이 타락해가는 시대에 이야기를 전국 각지에 알려 그 뜻을 교훈 삼아야 할 것이라고 제보자는 한마디 덧붙였다.

잉어명당

지은이 및 출처 : 윤재석(남, 임실군 강진면 갈담리 강진부락)

강진면 갈담리에 있는 백령산 정상으로부터 남쪽으로 흐르는 산맥이 흡사 용이 춤추는 행세를 하고 있는데 이 곳에 잉어 명당이 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옛날 어느 선비가 부모의 묘를 쓰기 위해 명당을 찾아 나섰는데 한 곳에 이르러 땅을 파니 바위가 나왔다.


선비가 이 바위를 들어내자 갑자기 잉어 한 마리가 튀어 나가고 다시 또 한 마리가 나오려고 했다.
이후 이 선비의 자손들은 고향을 떠나 멀리 나가야 부귀를 누릴 수 있다는 도인의 말에 따라 중국으로 건너갔다 한다.
과연 집안에 복록이 계속되니 이부상서의 높은 벼슬에 오른 자손이 생겨 오래도록 선비의 집안은 부귀영화를 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후에 이부상서까지 오른 이 자손이 우리나라에 사신을 보내 이 잉어 명당을 찾도록 했으나 끝내 찾지 못하고 말았다는 전설이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있다.

잉어소와 알초산

지은이 및 출처 : 김권상(남, 임실군 신평면 대리)

오랜 옛날 신평면 대리에 살고 있던 서씨 부인이 약초를 캐기 위해 산 속을 헤매고 있었다.
서씨 부인은 겨우 몇 포기의 약초를 발견하긴 했으나 약초는 높은 벼랑 위에 매달리듯 자라고 있어 어쩌지를 못하고 애만 태우고 있었다.
당장 그 약초가 없으면 10여 년이나 넘도록 병환으로 고생하시는 늙은 시아버지의 병환을 낫게 하지 못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서씨 부인은 이씨 집안으로 시집온 지 1년째 되던 해 남편은 죽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은 꽃다운 나이에 홀로된 것이 안되었던지 개가하기를 권했지만 서씨는 늙고 병든 시아버지를 홀로 남겨두고 떠날 수 없었다.
그래도 좋다는 약이 있으면 어느 곳이든 어떤 어려움이 있든 꼭 구해서 시아버지의 병 구환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런 효성에 감탄한 어떤 도승이 이 곳 마을을 지나다가 서씨 부인에게 오늘 이 약초를 캐어 다려 먹이면 쾌차할 것이라고 말하고는 어디론가로 가버렸다.


서씨 부인은 그냥 걷고만 있을 수가 없어 벼랑을 조금씩 오르기 시작했다.
발을 한치만 헛디뎌도 수십 길 벼랑으로 떨어져 꼼짝없이 죽을 무서운 벼랑이었다. 서씨 부인은 목숨을 하늘에 맡기고 조심조심 약초가 있는 곳까지 올라 겨우 몇 포기의 약초를 캐어 내려왔다.
서씨 부인은 애써 캐온 약초를 정성껏 다려 시아버지께 드렸더니 시아버지는 언제 아팠냐는 듯 씻은 듯이 나았다.


그러나 이번엔 며느리인 서씨가 쓰러지고 말았다.
며칠을 산 속을 헤매면서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한데다 여자의 몸으로 남자도 해낼 수 없는 너무 힘든 일을 했기 때문이다. 서씨의 효성을 닮기라도 한 듯이 이제 겨우 다섯 살인 아들 용이도 효성이 남달랐다. 병든 어머니 곁에서 간호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의 병은 점점 더 해만 갔다. 아들 용이는 어머니의 마음에서부터 약을 달려 드리는 일까지 다 해냈다.
그러던 어느 날 할아버지 병환을 낫게 해준 도승이 다시 이 마을에 나타났다.


[과연 효성의 집안이로구나]
하고 감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무슨 말인가 몇 마디 중얼거리고는 사라졌다.
용이는 조금 전 도승이 중얼거린 말이 무슨 말인가 궁금하여 그의 뒤를 따라갔다.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으로 그의 뒤를 쫓은 것이다.
[스님, 우리어머니 병을 낫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시오.]
[그놈 참 똑똑하구나 만약 가르쳐주면 그대로 하겠느냐?]
[예,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다하겠습니다.] [응, 과연 효심을 타고 난 지고]
스님은 먼 하늘을 바라보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돌려 용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매일 냇가에 나가서 잉어를 잡아다가 어머니께 달여 드리면 곧 낫게 될 것이다.]
라는 한마디를 남겨 놓고는 스님은 가던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러나 잉어를 잡는 것은 하늘에서 별 따기 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었다. 용이는 매일 냇가에 가서 물 속만 바라보며 울기만 했다.
어른도 못 잡는 잉어를 어린 꼬마가 어떻게 잡을 것인가. 길다란 막대기를 갖고 냇가로 나갔을 뿐 어쩔 수가 없었다.
얼마를 지났을까 울고 서 있는 용이의 막대기를 물고 잉어가 헤엄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막대기를 물고있던 잉어는 몇 번 파닥이다가 용이에게 쉽게 잡혔다.


그 이튿날도 또 그 이튿날도 잉어는 쉽게 잡혔다.
어머니의 병이 나은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효성이 너무 지극하여 용왕님이 도와준 것이라고 용이의 효성을 칭찬하였다.
지금의 신평면 대리에는 잉어소와 알초산에 얽힌 옛 전설이 그럴듯하게 내려오고 있다.

장제무림(長堤茂林)

지은이 및 출처 : 하찬호(남, 임실군 관촌면 방수리)

관촌면 방수리에는 지혜가 남달리 뛰어나고 기골이 장대한 황씨라는 장사 부부가 살았다.
마을 앞의 버려진 넓은 땅에 냇물이 흐르고 있었으나 아무 쓸모없는 황무지였다.


황씨 부부는 이 냇물 줄기를 다른 곳으로 돌려 황무지를 옥답으로 일구기로 했다.
홍수와 가뭄에 대비해서 제방을 쌓고 보를 막았으며 제방에는 나무를 심는 등 온갖 고난을 딛고 부부는 드디어 역사를 끝냈다.


그러나 제방을 따라 물줄기를 돌렸음에도 지형을 잘못 선택하여 물이 차지않는 것이었다. 오랜 고심 끝에 완공한 제방이나 보가 쓸모가 없게 돼버린 것이다.
실의와 비탄에 젖은 황씨 부부에게 그날 밤 꿈에 선인이 나타나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내일 아침 서리가 하얗게 녹지 않는 곳으로만 파나가면 쉽게 풀어질 것이다.」
과연 황 장수 부부가 다음 날 아침 현장에 나가 보니 때 아닌 서리가 녹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부부가 선인의 가르침대로 서리를 따라 도랑을 파고 물을 넣어보니 충분한 물이 흐르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의 방수리 넓은 황금들을 오늘까지 갖게 됐고 들판의 어느 곳을 파 봐도 냇물이 흘렸던 자국으로 강변 돌이 나오고 있다.
그 후로 세인들은 황씨를 황장군이라 부르게 됐고 이곳을 장제무림(長堤茂林)이라 하는데 길이 1백 50여 m의 보와 울창한 수림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또 방수리 뒷산에 커다란 묘가 있는데 황장군의 묘로 보이며 이 마을 사람들은 황장군 부부를 수호신처럼 받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정각(亭閣)골

지은이 및 출처 : 김해식(남, 임실군 삼계면 학정리)

아주 오랜 옛날 삼계리 왕지골이라는 작은 마을에는 다정하게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정씨 부부가 있었다 한다.


이 노부부는 슬하에 자식을 두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날마다 부처님과 산신령님께 아들 하나만 낳을 수 있게 해달라고 정성을 다하여 빌었다.
이러기를 얼마 동안을 계속했을까, 어느날 남루한 옷차림의 나그네 한 사람이 정씨 집을 찾아와 하룻밤 묵어가게 해달라고 사정을 하니 마음이 착한 정씨는 쾌히 승낙하였다.
그런데 한밤중에 이 나그네가 깊이 잠든 정씨를 깨워 달걀 한 개를 달라고 부탁하여 상한 달걀 한 개를 내주었더니 나그네는 그 길로 왕지골을 찾아 갔다가 바로 돌아오므로 이번에는 상하지 않은 달걀을 주고 난 후 이를 이상히 여긴 정씨는 나그네의 뒤를 몰래 밟아 보았다.


달걀을 손에 쥔 나그네가 왕지골 자리에서 달걀을 땅에 묻으니 바로 닭 우는 소리가 나는 것이 아닌가.
나그네는 땅을 치며
「이 자리가 내가 찾는 명당중의 명당이로다」
하며 크게 기뻐하였다.
눈 앞에 벌어진 광경에 넋을 잃고 바라보던 정씨는 그 자리를 유심히 보아 두었다가 후에 자기의 아버지 장사를 몰래 지내 버렸다.


장사를 지낸 바로 그 날밤 꿈에 백발을 한 노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내가 너에게 아들을 주겠노라」
고 말하고 사라져버렸다.
이후 부인에게 태기가 있어 열 달 후 아들을 낳았는데 새같이 날개가 달린 아들이었다.
정씨 부부는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면서도 열심히 정성을 다하여 길렀다.
그러기를 십 년이 지난 어느 날 저녁 때에 도승이 나타나 나에게 아들을 맡기라면서 콩 한말과 팥 한말을 같이 부탁하고 3년 후 아들을 돌려주겠으니 기다리라며 떠났다.


정씨 부부는 도승이 아들을 데리고 떠나는 뒤를 뒤쫓아가 보니 이 도사는 왕지골 바로 밑으로 내려가 임금 왕 '王'자가 새겨져 있는 돌을 손으로 쳐들어 갈라지니 그 속으로 들어 가는 것이었다.
이에 정씨 부부는 아들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그 옆에 소나무 다섯 그루를 심어놓고 매일매일 물을 주며 3년의 날자를 꼽기 시작했다.


날이 가고 해가 가고 3년이 지났다고 생각한 정씨 부부는 아들이 돌아 오지를 않자 불안하고 초조해진 나머지 석수장이를 데려다 아들과 도승이 들어간 자리의 돌을 깨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바위가 갈라지면서 핏물이 내를 이루기 시작하였다.
속을 들여 보니 콩은 사람이 되고 팥은 말이 되어 무술을 익히고 있는 중이었다.
아들은 울부짖으면서
「어머니 왜 7일을 더 기다리지 못 하셨습니까?」
하는 외마디 말을 남기고 쓰러져 죽고 말았다.
정씨 부부는 아들을 기다리는 조급한 마음에서 날짜를 잘못 꼽아 3년이 되려면 7일이나 더 있어야 하는데 성급하게 바위를 깨도록 하여 아들을 잃어 버린 것이다.

주인따라 죽은 충마(忠馬)

지은이 및 출처 : 홍대성(남, 임실군 청웅면 옥전리 명동부락)

현감 공 홍석한은 1726년(영조 2년)에 청웅면 옥전리 명동부락에서 홍이 집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엄격한 가정에서 학문을 닦고 예절이 바르니 어려서 총망을 받았다.


일찍이 한양에 올라가 공부하고 있을 때에 별안간 주위가 소란하여 나가보니 호마(胡馬) 한 필이 뛰어다니고 모든 사람들이 잡으려 하나 잡지 못하고 홍석한이 나서니 순응하고 잘 따르게 되어 타게 되었다.
이 때 얻은 이 말을 집에 돌아와 평생을 사랑하며 길렀는데 어찌나 잘 달리고 특출한지 천리마라 불렀다.


이 분이 1783(정조 7년) 뜻밖에도 부안 현감에 제수되자
[명분이 없이 나감은 양반의 수치]
라 하고 부끄럽게 여겨 바로 한양에 올라가 사임하고 돌아오는 길에 한밭(지금의 대전) 어느 객점에서 급환으로 작고하니 수행했던 종들과 객점 안에 혼란이 일어났다.


이를 안 말은 바로 집으로 달려와 대문을 두드리며 울어 댔다. 말의 울음소리에 놀라 깨어 뛰어 나온 식구들 앞에 말은 홀로 눈물 짓고 있었다.
고삐를 끌어 집으로 들이려 했으나 들어오지 아니하고 몸부림만 치므로 이를 심상치 않게 여긴 아들 홍영택이 말에 오르자, 말은 오던 길을 다시 달려 그 객점에 당도하였다.
이에 어른은 작고해 있었고 바로 반상준비를 갖추어 내려와 9일장으로 치렀으나, 말도 9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끝내 죽었다.


집안 사람들은 홍석한의 묘 아래에 말을 묻고 묘사 때마다 그 자손들이 매년 콩 한말과 재물로 그 넋을 위로하고 기렸다.
사람들은 이 어른의 고결한 인격과 숭고한 인품에 하늘의 은총이라 하고「그 주인에 그 말이다.」
하며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포수(砲手)바위

지은이 및 출처 : 정명규(남, 임실군 덕치면 사곡리 안하마을)

임실군 덕치면 사곡리 안하마을에서 남동쪽 1.5km 지점에 해발 415m의 약담봉이 있는데, 이 산의 상봉(上峰)에 포수 형상을 한 바위가 사곡리 쪽을 향하여 우뚝 서있다.

그 바위를 일컬어 포수 바위라 하며 그에 얽힌 전설은 다음과 같다.
옛날 이 마을에 취락이 형성된 후 밤낮 할 것 없이 약담봉에 살고있는 호랑이가 나타나 마을 주민들을 공포심 속으로 몰아 넣었다.
호랑이가 나타나는 날은 가축은 물로 사람까지도 잡혀갔다.
처음엔 밤에만 호랑이가 나타났으나 점차 호랑이가 새끼도 낳고 자꾸 번식을 하여 숫자가 많아지자 대낮에도 떼를 지어 산을 내려와 산기슭이나 들에 매어놓은 소를 물어가는가 하면 논과 밭에서 일을 하는 농사꾼과 산에서 나물을 캐는 처녀, 개울에서 빨래하는 아녀자 등 닥치는 데로 호랑이의 표적이 됐다.


이렇게 되자 농부들은 일을 할 수 없게 되었고 먹을 것이 없어 생계 위협까지 받게 됐다.
이에 관가에서는 주위의 포수들을 동원하여 호랑이를 잡으러 나섰으나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마을 주민들도 호랑이를 잡을 수 있는 묘안을 여러 가지 생각해 봤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던 차 마을의 어른들은 약담봉 산신제를 모서 산신령께 호랑이를 쫓아 줄 것을 기원하기로 했다.


마을 사람들은 목욕 재계하고 온갖 정성을 다해 제물을 준비하고 살아있는 돼지 4마리를 바치며
「제발 우리마을을 호랑이로부터 구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를 드렸다.
기도를 올린 바로 그 날 밤 주민들의 꿈에 약담봉의 신령이 현몽하여 이르기를
「너희들이 정성이 지극하고 재물이 흡족하여 내가 감동했으니 너희들 마을에 호랑이의 화가 없게 해주겠노라. 내일부터 약담봉 상봉아래 포수를 세워 놓을 테니 호랑이를 두려워 말고 생업에 종사하라」
하며 사라졌다. 꿈을 깨어나고 얼마 있으니 호랑이의 울음소리가 천지를 진동 시킨 후 조용해졌다.


다음 날 아침 약담봉을 바라보니 전날까지 없었던 바위가 마을을 내려다 보는 위치에 포수처럼 우뚝 솟아 있었다.
이 포수모양을 한 '포수바위'가 생긴 이후부터는 호랑이가 나타나지 않아 사람들은 지금까지 평화롭게 살고 있다.
오늘날 까지도 이 바위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마을을 굽어보며 우뚝 서있다.

흔들바위와 남매의 우애

지은이 및 출처 : 곽병찬(남, 임실군 둔남면 주천리 수레지)

둔남면 오수리에서 10리 남짓 떨어진 주천리 마을의 맞은편에 높이 솟은 매봉이라는 산이 있다.


이 산 중턱에는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바위 하나가 있는데 이 바위는 수십 명의 장정들이 움직이려 해도 꼼짝하지 않으면서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흔들흔들 하여 흔들바위라고 부르고 있다.
이 바위에는 남매의 애틋한 사연이 전설로 얽혀있어 찾는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다.


아주 오랜 옛날에 이 마을엔 마음씨 착한 오누이가 살고 있었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둘은 가난하지만 오붓하게 서로를 의지하며 살고 있었다.
성이 양씨인 이들 오누이는 어려서부터 부모가 없는 서러움을 서로 달래며 튼튼하고 예쁘게 자라났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두 오누이는 장가 들고 시집갈 나이가 되었다.
오빠인 양총각은 힘이 장사였다.
어찌나 힘이 센지 이 마을 사람은 물론 인근 마을 사람들까지도 당해낼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동생인 양처녀도 얌전하고 예쁘기가 천사와 같았다.
양총각은 항상 동생인 양처녀를 좋은 집에 시집 보내는 일이 걱정이었다.


그와는 반대로 동생은 오빠가 빨리 색시감을 고르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러나 양총각에게는 마땅한 배필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랫마을에 사는 부잣집에서 양처녀에게 청혼이 들어왔다.
나무랄 데 없는 청년이어서 오누이는 쾌히 승낙을 하고 이듬해 봄에 성혼하기로 결정하였다.
오빠는 그날부터 더욱 열심히 일하였다.
한푼이라도 더 벌어서 동생의 혼수마련을 많이 마련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동생이 시집을 가는 길엔 시냇물이 흐르고 있어 가마를 타고 건너기가 어려움을 알고 큰 내에 커다란 돌멩이를 들어다가 징검다리도 만들어 놓았다.
어찌나 힘이 센지 집채만한 바위를 마치 자갈이나 돌멩이 다루듯 하였다.
그런데 그 해 나라에선 전쟁터에 나갈 수밖에 없었다.
동생 결혼식을 몇 달 앞두고 전쟁터에 나가는 오빠의 마음은 찢어 질 듯 아팠다.
양장사는 결혼식 전에는 꼭 돌아오겠다고 약속을 하고 누이 동생과 헤어졌다.
그러나 이듬해 3월이면 돌아오겠다던 오빠는 2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다.
아랫마을 총각은 이미 청혼한 사이이니 혼례를 올리자고 하지만 양처녀는 오빠가 돌아오기 전에는 식을 올릴 수가 없다고 거절하면서 날마다 매봉에 올라가 높은 바위에 앉아 오빠가 돌아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랫마을 총각은 기다리다 못해 다른 집 처녀를 아내로 맞아 들이고 말았다.
그렇게 1년이 또 지난 어느 날 매봉 바위 위에 올라앉아 오빠를 기다리던 양 처녀는 그대로 쓰러져 죽고 말았다.


며칠이 지난 후 전쟁터에서 큰 공을 세운 오빠는 장수가 되어 돌아 왔으나 몽매에도 잊지 못했던 누이동생은 보이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로부터 누이의 소식을 전해들은 오빠는 가슴이 매어지는 듯한 슬픔에 빠졌다.
가엾은 동생이 한을 어떻게 풀어줄 것인가를 몇 날 며칠동안을 식음도 전폐한 채 바위를 치며 슬퍼하였다.
이 때 양장사가 바위를 내리치는 바람에 그 큰 바위가 두 동강이 났다.
그 뒤로 이 바위는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흔들흔들 하는 것이었다.
오빠는 죽은 여동생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흔들바위 옆에 큰 바위를 들어다가 놓고 그 위에 사모관대 모양의 바위를 얹어 신랑과 같이 만들어 놓았다.


후에 마을 사람들이 흔들바위가 밑으로 굴러 떨어질까 두려워서 장정들을 불러모아 밀어보려 했으나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바위를 건드리자 갑자기 매봉 위에 검은 먹구름이 몰리더니 천둥과 번개를 치면서 소나기가 쏟아지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 후로 이 바위를 그대로 두고 흔들바위라고 불러오고 있다.

출처 : 임실을 사랑하는 사람들
글쓴이 : 바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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