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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문화유산] 057. 옐링의 흙으로 쌓은 보루, 비석, 성당

by 임실사랑 2007. 7. 21.

덴마크 (DENMARK)

[세계 문화유산] 057. 옐링의 흙으로 쌓은 보루, 비석, 성당( Jelling Mounds, Runic Stones & Church : 문화, 1994 )

옐링의 흙으로 쌓은 보루, 비석, 성당 ( Jelling Mounds, Runic Stones & Church )

1994년에 지정된 세계문화유산

- 옐링 분구와 루닉 스톤(룬체의 비문)은 이교적 노르딕(북유럽) 문화의 두드러진 사례로 10세기 중엽 덴마크인들의 그리스도교 교화를 나타내 주는 유적이다.

- 루닉(runic)은 고대 북유럽지역의 문자체로 장식적이고 몸체가 굵어 주로 비문 등에 사용된다.

- 고름 노왕과 튀라 왕비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높이 10m의 북쪽 분묘. 그리스도교국으로 바뀌던 시기에 덴마크 왕국의 역사가 시작된 이 곳은 지금도 잘 손질된 공원으로 바뀌었다.옐링의 흙으로 쌓은 보루, 비석, 성당

8세기 말에서 11세기 중반까지는 덴마크의 역사에서 바이킹의 시대였다. 전통적인 신앙을 버리고 그리스도교로 바뀌던 이 시대를 유틀란트 반도 중부에 위치한 옐링만큼 생생하게 보여 주는 곳은 없다. 덴마크 왕국 최초의 국왕인 고름은 이 곳을 수도로 정해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로 삼았다. 전통적인 신들을 믿던 고름 노왕(老王)의 아들 푸른 이빨왕 하랄은 그리스도교 세례를 받고 왕국 건설을 추진했을 뿐만 아니라, 노르웨이까지 영토를 넓혔다. 옐링에 남아 있는 이 변혁기의 고고학 자료는 거대한 분묘 2기와 성당, 그리고 룬 문자가 새겨진 비석 2기와 세공이 안 된 기념석 조각이다.
  덴마크는 그리스도교 국가가 되기까지 기나긴 우여곡절을 겪었다. 700년경에 포교를 위해 영국에서 파견된 선교사 윌리브로드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 후 826년, 덴마크 왕국이 세워지기 전인 덴 왕국의 하랄 클라크 왕이 당시 최대의 그리스도교 국가였던 프랑크 왕국의 잉겔하임 궁전에서 비밀리에 세례를 받았다. 그 세례식에서 하랄 클라크 왕의 대부가 된 사람은 프랑크 왕국의 경건왕 루트비히였다. 그러나 이 하랄 클라크 왕의 개종에도 불구하고, 또한 같은 해에 포교 활동을 시작한, 훗날 함부르크-브레멘의 초대 대주교가 된 안스가르의 노력으로도 덴마크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할 수는 없었다. 그로부터 100년 정도가 지나고 안스가르의 후계자 가운데 한 사람인 함부르크-브레멘의 대주교 운니가 덴마크 왕국의 초대 국왕 고름을 개종시키려 했지만, 이것도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고름 노왕은 선교사가 덴마크에 머무는 것은 허락해 주었다.
  당시 덴마크에서의 포교 활동을 관할한 사람은 오토 대제가 다스리는 동프랑크 왕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함부르크-브레멘 대주교였다. 그러므로 당시 덴마크는 남쪽 국경을 접하고 있던 동프랑크 왕국으로부터 커다란 정치적 압력을 받았을 것이다. 960년에 고름 노왕의 아들 푸른 이빨왕 하랄이 세례를 받아, 드디어 그리스도교는 덴마크에서 공식적으로 종료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푸른 이빨왕의 재위 기간 마지막 시기인 985년경에 왕과 그의 아들 스벤 1세가 대립하여 무력 항쟁이 벌어졌다. 이것은 스벤 1세가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리려고 한 것이 원인이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덴마크는 크누트 2세 때인 11세기에 이르러서야 그리스도교가 널리 보급되었다. 크누트 2세는 굳은 내부 결속력을 지닌 그리스도교가 나라의 통일을 위한 중요한 열쇠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둘러싼 사색
  덴마크 왕국이 탄생한 땅 옐링에서 당시를 떠올릴 수 있는 유적으로 성당, 거대한 분묘, 바이킹 문자인 룬 문자가 새겨진 비석 2기, 그리고 세공이 안 된 기념석 조각이 있다. 이것은 중세 말기의 덴마크에 전통적인 신앙과 그리스도교가 공존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증거이다.
  1100년경에 거대한 분묘 2개 사이에 건설된 성당은 현재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이 소박한 석조 성당은 여러 차례 화재의 피해를 입었는데, 복원 과정에서 12세기 초에 그려진 회화가 발견되었다. 한편, 내진 아래에서는 이 석조 성당 이전에 만들어진 목조 성당의 흔적이 3군데나 발견되었다. 그 때 발견된 것 가운데 하나인 넓은 제실에서 중년 남성의 유골 일부와 왕의 의상 일부가 출토되어, 이 곳이 고름 노왕의 무더이 아니었을까 하는 기대와 함께 갖가지 의견을 낳았다. 이 유적은 푸른 이빨왕 하랄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했을 때 세운 덴마크 최초의 성당이라고 여겨지며, 그리스도교도인 푸른 이빨왕이 끝내 개종하지 않았던 부왕의 묘를 성당 내부에 마련한 것이라고 추측된다. 그 때 설치한 것으로 짐작되는 석류석(주로 장식용이나 연마재로 쓰이는 광물. 빛깔은 황색, 갈색, 적색, 흑색임) 원석을 포함한 화강암이 발견된 뒤부터 다시 제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옐링의 성당 북쪽과 남쪽에는 원뿔 윗부분을 잘라낸 듯한 모양의 거대한 분묘 2기가 있다. 그 중 북쪽 분묘에는 목제품 등의 보물이 발견된 넓은 방도 있었다. 과학자들은 북쪽 분묘가 만들어진 기간을 958년에서 959년 겨울이라고 비교적 짧게 가정하고 있다. 이것이 왕묘이며, 성당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그 곳에는 고름 노왕과 왕비 튀라의 유체가 잠들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남쪽의 분묘는 덴마크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왕묘이다. 이 분묘는 1970년대의 발굴 조사 결과, 970년 당시에는 아직 미완성이었으며, 처음에는 묘가 아니라 기념비였다고 추측하고 있다. 최대의 룬 비석
  이곳에서 발견된 기념석 조각은 분묘의 일부라고 여겨지며, 이것은 가장 오래된 고고학 자료 가운데 하나이다. 바이킹 시대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고 추측되는 이 기념석 조각에는 세공이 전혀 되어 있지 않고 비문도 보이지 않는다. 또 성당 앞에 자리잡은 룬 문자가 새겨진 비석 2기는 그 크기만으로도 인상적이며, 덴마크 문자 예술품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비석 가운데 크기가 작은 ‘고름 비석’은 높이가 1.4m, 폭 1m, 그리고 두께는 50cm나 된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고름 비석’에 대한 해독을 놓고 의견이 많지만, 일반적으로 ‘고름 왕은 이 돌을 덴마크의 자랑인 왕비 튀라를 위해 건립했다.’로 해독한다. 높이 2.4m, 최대 폭이 2.9m나 되는 북유럽 최대의 룬 비석 ‘하랄 비석’에는 북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예수상이 새겨져 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예수가 바이킹의 전통적인 띠 모양의 장식에 둘러싸여 있다는 점이다. 이 부조는 덴마크가 새롭게 그리스도교 국가가 된 뒤에도 그 이전의 신앙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풍부한 표현력으로 전해 주고 있다. 말하자면 과거와 현재를 뒤섞어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비석의 또 다른 면에 새겨진 그리핀도 띠 모양의 장식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리핀이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성스러운 동물로, 오리엔트에서 기원한다. 이것은 푸른 이빨왕 하랄의 노르웨이 정복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 비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하랄 왕이 아버지 고름과 어머니 튀라를 그리며 건립하다. 하랄 왕은 덴마크의 모든 영토와 노르웨이를 쟁취하고 덴마크인을 그리스도교도로 만들었다.”
  비석에 새겨진 룬 문자에 따르면, 이것을 건립한 인물은 고름 노왕과 푸른 이빨왕 하랄이며, 이로 인해 그들의 공적은 영원히 칭송받고 있다. ‘고름 비석’은 고름 노왕이 죽기 직전에 세워졌고, ‘하랄 비석’은 푸른 이빨왕 하랄이 살아 있던 983년경에 세워졌다. 이 비석들은 덴마크 역사에서 연대가 확실한 왕가의 첫번째 기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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