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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의 문화관광/국가.도 지정 문화재

지방유형문화재 144호 김복규, 김기종 효자 정려비 및 정판

by 임실사랑 2013. 6. 12.

 

 

 

전라북도 임실군 임실읍 정월리에 있는 조선시대 비석.
지정번호   전북유형문화재 제144호
지정연도   1993년 8월 31일
소장   김해김씨 호은공파 종중
소재지   전북 임실군 임실읍 정월리 561
시대   조선시대
분류   석비
김복규·김기종효자정려비 및 정판 []

ㆍ연 혁

임실읍 정월리 당목 마을에 위치한 효자비각으로 김복규 부자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철종 6년 나라의 명으로 건립하였으며 효행기록은 다음과 같다. 김복규는 효성이 지극하여 16세에 부모상을 당하여 묘지를 정하지 못한 채 밤낮으로 슬픔을 이기지 못하던 중 천신의 현몽으로 신약을 얻어 다려드리니 다시 깨어나 천수를 누리게 하였다. 이같은 행장을 찬양하여 나라에서 증 공조참판 동지의금부사의 벼슬을 제수했다. 김기종은 부친의 효심을 이어받아 효성이 지극하였고 부모상에는 3년간을 묘소에 초막을 짓고 그 애통하는 호곡이 마치 호랑이 울음처럼 산야를 메아리쳐 그 효심을 기리기 위하여 마을 이름까지 호동으로 바뀌어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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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8월 31일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44호로 지정되었다. 김복규()·김기종() 부자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1885년(철종 6) 나라의 명에 따라 건립한 비석으로, 당목마을 효충서원에 서원사적비와 함께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김복규가 16세 때 부친상을 당하였으나 묘를 정하지 못하여 슬픔에 빠져 있던 중 꿈에 천신(
)이 나타나 이르는 대로 약을 구해 다려 드리자 부친이 다시 살아나 천수를 누리니, 나라에서 그의 효행을 찬양하여 증공조참판 동지의금부사의 벼슬을 제수하였다.

그의 아들 김기종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부친상을 당하자 3년 동안 초막을 짓고 묘소를 지켰는데, 그의 울음소리가 마치 호랑이 울음소리 같아 마을 이름을 호동(
)으로 바꾸어 불렀다 한다. 각각의 비석에는 김정희()의 글씨로 ‘조선효자 증참판 김공복규 정려비( )’와 ‘조선효자 증교관 김공기종 정려비( )’라고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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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규, 김기종 부자 정려문은 삼천동 상거마 부락에 위치하였으나 현재는 임실군 임실읍 정월리에 옮겨져 있다. 이 정려문은 이들 부자의 양대에 걸친 효심을 기리기 위해 1855년(철종 6년)에 세운 것이다. 김복규는 효심이 지극하여 16세 때 부친상을 당하자 장지를 정하지 못한 채 슬픔에 잠겨 있던 중 도사의 현몽으로 장지를 정했다. 특히 그는 아버지가 병으로 운명 직전에 있었으나 역시 도사의 현몽에 따라 약 처방을 알아 천수를 누리게 하였다. 나라에서는 김복규의 지극한 효심을 알고 공조참판동지 의금부사의 벼슬을 제수하였다.

비석의 유래

이에 김복규의 아들 김기종도 부친의 효심을 이어받아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고 부모상을 당하자 3년간 시묘살이를 하며 애통해 했는데 마치 그 울음소리가 호랑이의 울음소리처럼 산야에 메아리쳐 마을사람들이 그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마을 이름까지 호동(虎洞)으로 바꾸어 불렀다 한다. 나라에서는 이조참판 서유훈으로 하여금 비를 세우도록 하고 추사 김정희가 글씨를 써 오늘에 내려오고 있다.

추사 김정희가 쓴 정려기에는 〈증참판 김복규의 정려기라. 김복규는 효자이다. 순조 계미(순조23년, 1823년)에 정려를 세웠는데 그 송(頌-칭송하는 글)에 말하기를 고목나무 버섯의 뿌리요 단샘의 근원이라 효자에는 효자 정문을 세워 그 효행을 대대로 빛나게 하리. 완당 김정희 서〉라 새겨져 있다.

손자 영곤의 비문에는 〈아버님이 남기신 말씀에 따라 완옹(김정희)에게 비명을 부탁하였다. 완옹의 글은 매우 간결하고 엄숙하였다. 편액에는 「양세정효각(兩世旌孝閣)」이라 쓰고 또 「효덕연경당(孝德衍慶堂)」또는 「육행당(六行堂)」이라 적었다. ‘2대에 걸친 효자각’이요, ‘효행의 덕으로 경사스러움이 넘친다’, ‘여섯가지 덕행’이다 하는 이 뜻만으로도 더 이상 누누한 여러말을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아 삼가 그 대략을 쓰는데 그친다〉하고 날짜와 비를 세운 이, 글 지은 이, 글쓴 이, 글 새긴 이의 이름을 적었다. 이 비석은 정려를 내린지 33년만인 1855년(철종6년)에 세운 것이다.

김기종에 대한 비석은 다음과 같다. “효자인 증동몽교관 김공 기종의 정려기라. 김기종은 복규의 아들이다. 대대로 효행이 뛰어나 그 아버님의 정려를 내린 후 29년만인 금상(철종) 2년(1851)에 「동몽교관」의 증직을 받았고 2년 후에는 다시 정려를 내렸다. 그 송에는 「아름답게 일어나는 효자여, 정성스런 어짐이여, 흠없는 공양이여, 물가의 난초와 같도다. 아! 초목도 감동하여 꽃을 맺지 아니하고 사나운 독수리도 엎드려 날아오네. 이 효성은 만세에 멸치 않을 것이니 후에 사람들에게 전하리라」”하고 「완당 김정희 서」라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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