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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향 임실/임실군 자료

6.25 전쟁과 임실

by 임실사랑 2012.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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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노규 준장

요 약 정 보
 
● 한문 : 朴魯珪
● 생몰연대 : 1918.3.14-1951.3
● 출신지역 : 전북 임실
● 최종계급 : 육군 준장
● 상훈내용 : 태극무공훈장
● 참고문헌 : 태극무공훈장에 빛나는 6.25전쟁 영웅, 자유민에게 전해다오 1집
상 세 설 명
 
※약력

*1918. 3 전북 임실 출생
*1946. 11 국방경비사관학교 졸업 및 육군참위(소위) 임관
*1949. 6 수도경비사령부 작전참모
*1950. 1 옹진지구전투사령부 작전참모
*1950. 5 제 6사단 2연대 부연대장
*1951. 3 전사
*1951 3 육군준장(추사)



1. 생애


   1918년 3월 14일 전북 임실군 둔남면에서 출생한 박노규(朴魯珪) 준장은 편부 슬하에서 소학교를 겨우 마칠 정도로 극빈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과묵한 성격에 인내심이 강했던 그는 결코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신의 일에 충실한 학생이었다. 소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일본이 패망하자 국군에 자원할 것을 결심하였다.
   1946년 11월 국방경비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졸업과 동시에 육군 참위(소위)로 임관되어 10216의 군번을 부여받았다. 당시 재임하고 있던 재정관보다는 일선 지휘관으로 활동하기를 원했던 박노규 대위는 제4연대 작전주임장교로 취임한 뒤 곧이어 발생한 여.순 10.19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1개 연대 병력을 이끌고 현지에 참전하였다.
   순천을 탈환하고 여수로 진격, 목표를 탈환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당해 1개월간 병원생활을 해야만 했다. 이후 육군사관학교 교무처장을 거쳐 1949년 6월 수도경비사령부 작전참모로 전보된 박노규 소령은 1950년 1월 옹진전투사령부 작전참모로 옮겨 6.25전쟁을 앞두고 불법 도발을 강행했던 북한군과 수 회에 걸쳐 전투를 전개하였다.
   그 중 하나인 은파산전투를 마치고 육군보병학교 고등군사반에 입교하여 현대전술에 대한 연구를 하던 중 5월 1일 육군중령으로 진급하였고, 아울러 홍천에 주둔하고 있던 제2연대 부연대장에 보직되어 6.25전쟁에 나서게 되었다.
   남아로서의 진정한 용기와 상관으로서의 숭고한 부하애 및 인간애를 동시에 지녔던 장군은 이화령전투에서 전사한 김용하(金鎔河) 대위의 시신을 손수 등에 업고 싸우고, 또 후퇴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어용산전투에서는 사살한 적군의 시체 1,000여 구를 모두 묻어주는 인간애를 발휘하기도 하였다. 조림산전투에서 부상으로 병원에 후송될 때에는 “부상을 당해 더 싸우지 못해 조국에 미안하다. 그러나 곧 완쾌되어 전선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할 정도로 책임감이 투철한 지휘관이었다.
   정부는 박노규 대령의 살신보국과 임전무퇴의 정신을 귀감으로 삼고자 1951년 4월 27일 태극무공훈장(훈기번호 제2호)을 수여하였고, 동시에 육군준장으로 추서하였다. 현재 장군의 유해는 서울 동작동국립현충원 장군묘역 1-47에 안장되어 있다.



>2. 공적


   1951년 3월 3일 후방에서 준동하는 북한군 제10사단 소속의 패잔병을 포착.섬멸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일월산전투에 참전한 제2사단 31연대장 박노규 대령은 3개 대대의 소수 병력을 인솔하고 560고지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적에게 맹렬한 측면공격을 가함과 동시에 무질서하게 도주하는 적을 추격, 치열한 섬멸전을 전개한 끝에 적을 완전 궤멸시킴으로써 부여된 임무를 완수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그는 적의 총탄에 피격되어 현장에서 전사하였다.
   박노규 중령은 1950년 7월 14일 문경지구전투에서 이화령을 방어하고 있던 제3대대가 돌파위기에 처하자 연대장 함병선 대령의 명에 의해 역습을 결행, 적을 격퇴하고 전세를 역전시키는 수훈을 세웠다.
당시 음성과 충주지구에서 적의 남침을 효과적으로 저지했던 제6사단은 문경지구로 철수하여 이화령 일대에서 북한군 제1사단의 침공을 저지하고 있었다. 이화령은 중부전선을 방어하는 천연적인 요새를 형성하고 있으며, 태백산맥에서 갈라진 소백산맥이 이 지역을 지나가고 있었다.
   제6사단이 문경방어에 임한 지 이틀째인 1950년 7월 14일 북한군 제1사단은 주공 방향을 사단의 좌일선인 제2연대 정면에 두고 기동이 양호한 3번 도로를 따라 이화령을 일격에 돌파하려고 공격을 개시하였다.
   04시 30분경 적은 1개 연대 규모의 병력으로 각종 포병의 지원하에 짙은 안개를 틈타 제2대대와 제3대대의 진지로 돌격을 감행하여 백병전이 벌어졌으며, 좌일선의 제3대대는 20여분간의 격돌 끝에 일부 병력이 분산되어 혼선을 빚고 있었다.
   이 무렵 연대장은 이화령관측소에서 전방을 관측하였으나 짙은 안개로 진지를 확인할 길이 없고 제2대대와 제3대대는 통신마저 두절되어 전황을 파악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약 3시간이 경과된 08시경 안개가 걷히면서 북쪽 능선을 관측하자 진지를 사수할 것으로 믿었던 제2대대와 제3대대 병력이 이화령 쪽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이에 연대장은 이화령 동쪽 능선을 사수하고 있던 제1대대장 박노규 중령에게 633고지를 탈환하라는 역습명령을 하달하였다. 대대장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제2중대와 제3중대가 3번 도로의 동쪽 능선을 따라 돌진하면서 적을 역습하기 시작하자 후퇴하던 인접대대 병사들도 역습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하였다.
이때까지 제2대대는 633고지에서 혈투를 벌이고 있었는데 오히려 이것이 퇴각하는 적에 대한 차단진지가 되어 제2대대와 제3대대가 제1대대의 역습 대열에 가세하는 양상으로 변모, 12시 40분경에는 연풍까지 탈환하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연대는 적 사살 800여 명, 포로 7명, 장갑차 3대, 트럭 10대, 75밀리 유탄포 3문, 각종 소총 13정을 노획하는 대 전과를 올렸다.
   그 후 박노규 대령은 제2사단 31연대장으로서 경북 일월산 일대의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하게 되었다. 1951년 2월 국군 제2사단은 육본 작전명령 제23호에 의거 풍기에서 의성으로 이동하여 육본 직할부대로써 후방에서 공비소탕전을 전개하던 2개 독립경비대대, 1개 국민방위군 연대, 2개 태백산전투경비대대를 통합지휘하였다. 당시 경상북도의 산악지대에는 북진중인 아군에 의해 퇴로가 차단된 북한군 제10사단이 재산(在山) 공비와 합세하여 후방 치안을 교란하는 동시에 군의 주 보급로를 차단하고자 완강히 시도하였으며, 그 병력은 5,000여 명에 달하였다.
   1951년 2월 28일 청송 방면의 북한군 제10사단이 북상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제2사단장 함병선 준장은 이들을 원거리에서 포위 격멸하기로 결심하고 예상 통로인 일월산 부근을 차단하도록 명령하였다. 명령에 의거 병참선을 경계하던 제31연대는 일월산 남서쪽의 장갈령을 차단하여 3월 1일 새벽에 북상중인 적 1,500여 명을 기습공격하여 많은 피해를 주었다.
   이 무렵 제17연대와 제32연대도 보현산 일대에서 일월산 남쪽으로 이동하여 일월산 일대에 3중으로 차단선을 설치하자 적 제10사단은 800명과 400명으로 2개조를 편성하여 차단선 돌파를 시도하였다. 이에 사단은 5일부터 전 병력을 투입하여 5일에 걸쳐 일월산-통고산으로 적을 추격하였다.
이 작전에서 제2사단은 적 사살 469여 명, 포로 40여 명과 293점의 장비를 노획하는 대 전과를 거두었으나, 일월산소탕작전에서 제31연대를 지휘하던 연대장 박노규 대령이 제3대대장 이오열(李奧烈) 중령과 함께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1951년 3월 3일 연대를 지휘하던 박노규 대령은 경북 봉화군 소천면 일월산 일대에서 아군 보급로 확보에 주력하던 중 적이 압도적인 병력으로 아군 진지를 돌파하려 하자 한 손에 권총을 빼어들고 진두지휘를 실시, 장병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그러나 박노규 대령이 적진으로 돌진하는 순간 적의 흉탄이 그의 복부를 관통한 데 이어 3발의 흉탄이 손과 복부에 명중함으로써 현장에서 전사하였다.



* 참고문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태극무공훈장에 빛나는 6.25전쟁 영웅, 2003
국방부, 자유민에게 전해다오 제1집, 1955
육군본부, 한국의 전쟁영웅들, 1992
이원복, 호국용사100선, 명성출판사, 1976
국방부, 호국의 별 제3집, 1979
포병학교, 포병의 발자취, 1963
병학사, 내 젊음 조국에, 1987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38도선 초기전투: 중동부전선 편, 1982
국방일보,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2002. 11. 9
국방부, 한국전쟁사 제8집, 1975
공군본부, 공군사 제1집
육탄 10용사 현충회, 육탄 10용사, 도서출판 法政, 1986
국방부, 호국의 별, 제6집, 국방부 정훈국, 1982
국방일보, 한국의 전쟁영웅들 (1) 육탄 10용사, 1992. 6. 4
국방부, 호국전몰용사공훈록 제3집, 1997

오재룡 상사

요 약 정 보
 
● 한문 : 吳濟龍
● 생몰연대 : ? -1949.5.4
● 출신지역 : 전북 임실
● 최종계급 : 육군 상사
● 상훈내용 : 을지무공훈장
● 참고문헌 : 한국전쟁사 제 1집, 한국전쟁의 영웅들, 육탄 10용사
상 세 설 명
 
1. 생애

  전라북도 임실군 삼계면 삼은리에서 오석봉의 2남으로 태어난 오제룡(吳濟龍)은 국방경비대에 입대하여 군번 1301256과 함께 하사계급을 부여받고 제1사단 11연대에서 복무하였다. 이어 연대와 함께 제주도로 이동해 한라산 일대에서 공비토벌작전을 수행한 그는 문산으로 이동해 연대 예하의 하사관 교육대에서 피교육생으로 복무하던 중 송악산 전투에 참전하였다.
   그는 송악산 전투에서 특공대에 자원해 육탄공격으로 적의 토치카를 파괴하고 1949년 5월 4일 현장에서 전사하였다. 정부는 그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1949년 6월 28일 육군 일등상사로 특진과 함께 1950년 12월 30일에 을지무공훈장을 수여하였다. 또한 서울 국립현충원에 안장번호 서5-33946번으로 안장하였으며, 경기도 파주군 통일공원 내에 육탄10용사 충용탑과 전쟁기념관 전사자명비에 이름을 새겨 추모하고 있다.



2. 공적


   오제룡 육군 일등상사는 송악산지구 5·4전투에서 적의 토치카를 육탄으로 분쇄한 육탄 10용사 중의 한 명이다.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미·소 양군이 남북한에 각각 진주하자, 그들은 38선상에서 남북간?주요 교통로를 차단하고 경비에 임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국방경비대가 정식으로 국군에 편입되자, 그 동안 미군이 담당하던 38도선 경비임무가 점차적으로 국군에 이양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1948년 11월 수원에 주둔하고 있던 최경록(崔慶祿) 중령 지휘하의 제11연대가 문산으로 이동해 미 제7사단 예하 32연대가 담당하고 있던 38도선 경비구역을 인수받았는데, 이 구역은 청단에서 고랑포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미군의 경비책은 너무나 소극적인 방법으로 겨우 간선도로의 요소에만 초소를 설치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개성지구의 요충지인 송악산 일대는 무방비상태나 다름없이 방치하고 있었다. 이와는 반대로 소련군 지휘하에 있는 북한 제38경비대는 송악산 일대에 강력한 진지를 구축하고 선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송악산은 해발 488m로 개성의 바로 북쪽에 솟은 뒷산으로 산등성이를 동서로 가르듯이 38도선이 그어져있다. 해발 488m의 주봉과 그와 남북으로 맞선 475m의 봉우리 사이를 38도선이 지나고 있었다. 다시 말해, 38도선 북쪽에 주봉이 있고, 남쪽에 둘째 봉우리가 있었다. 북한군은 이러한 지형을 최대한 이용해 38선경비대를 주봉에 대대적으로 배치하여 국군의 경비초소에 사격을 가하곤 했다. 두 봉우리는 13m의 고도 차가 있어 아군이 불리한 위치였으며, 북한군은 높은 곳에서 감제하는 반면에 국군은 낮은 곳에서 감제를 당하는 입장이었다. 뿐만 아니라 송악산에서 바라보면, 바로 남쪽 기슭에 있는 개성시가지 한 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개성은 늘 북한군으로부터 관측을 당하고, 국군은 주봉에 가리어 북쪽 기슭인 토성면 일대를 제대로 관측할 수 없었다.
    다행히도, 송악산의 능선이 동쪽으로 흘러 몇 개의 낮은 봉우리를 매듭짓는 곳에 이르러서는 국군이 유리한 지형이었다. 이 곳은 개성 시가지의 동북쪽이며, 38도선이 그어지기 전부터 의 도로와 전답이 넓게 트인 개활지로서 몇 개의 봉우리가 38선 남쪽에 위치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국군은 이 몇 개의 봉우리에 292고지, 유엔고지, 비둘기고지라는 명칭을 붙여 경계부대를 배치하였다.
    이러한 전선을 인수받은 제11연대장 최경록 중령은 전 지역에 대한 현지정찰을 마치고 전술적인 요지에 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청단에서 고랑포에 이르는 많은 요지 중에서도 특히 개성 시가지를 반월형으로 포옹하고 있는 개성 북방의 송악산 산줄기가 38도선에 연하고 있어 지형적으로 아군에 불리하여 진지구축이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아군은 적 진지전선에 겨우 마대진지를 구축하는 정도였다. 아군이 진지공사에 착수하자 북한군은 아군이 진행하고 있던 진지공사를 방해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쌍방간에는 사소한 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북한군이 1948년부터 1949년까지 38선 전역에서 자주 불법침입을 자행했던 것은 그들의 실전훈련과 국군의 능력을 시험해보고 그리고 진지구축을 방해하려는 두 가지의 목적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의도로 북한군은 옹진반도, 개성, 동두천, 춘천, 주문진 등 장차 남침의 공격정면이 될 38도선 도처에서 불법침입을 자행하였다.
    1949년 4월 25일 남천점(南川店)에 주둔하고 있던 북한군 제1사단 예하 3연대의 증강된 1개 대대 병력이 송악산 후방의 냉정리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며칠 후인 5월 3일 아군의 3개 중대병력이 송악산 능선을 타고 38도선 남방 100여 미터 지점에 위치한 292고지에 이르러 진지공사를 시작하자 북한군 병력은 불법적인 공격을 가해 292고지를 점령했다.
    당시 제11연대의 상황은 문산에 본부를 두고, 김종훈(金鍾勳) 대위가 지휘하는 제2대대가 청단, 연안, 백천, 송악산 일대에 배치되어 진지공사에 임하고 있었으며, 제1대대는 신병교육을, 그리고 제3대대는 제5연대에 배속되어 파견 중에 있었다. 따라서 제11연대의 예비대는 겨우 신병교육중인 제1대대와 연대 하사관교육대의 1개 중대 병력에 불과했다.
    연대장 최경록 중령은 문산에서 교육을 받고 있던 제1대대의 제3중대와 4중대를 급히 제2대대로 증원하는 한편 교육수료를 앞두고 연안 방면으로 행군훈련을 하고 있던 하사관교육대를 급히 개성으로 복귀시켜 반격작전을 감행하도록 준비시켰다.
    5월 4일 미명, 292고지탈환을 위해 제2대대 7중대와 제1대대 3중대 및 4중대를 제2대대장 김종훈 대위가 지휘하여 292고지 정면에서 공격을 개시했고, 김영직(金永稷) 대위는 하사관교육대를 지휘하여 신관지서 후방에서 공격을 개시했다.
    한편, 문산에 주둔하고 있던 105㎜ 포병 1개 중대도 한광선(韓光鮮) 중위 지휘하에 급히 개성으로 이동해 공격부대를 지휘했으나 별다른 성과가 없어 다시 문산으로 철수하고, 서울 영등포에 주둔하고 있던 포병 제6대대와 57㎜ 대전차포 2개 중대가 노재현(盧載鉉) 대위의 통합 지휘하에 개성으로 이동되어 화력으로 직접 지원했다. 그러나 포병이 창설된 지 일천해 훈련이 미숙한 점도 있었지만 포구경이 작은 야포였기 때문에 적의 진지를 파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북한군이 발사하는 포탄은 개성 시내에까지 낙하해 많은 건물이 파괴되었다.
    더욱이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는 비둘기고지, 155고지, 유엔고지 및 아군이 피탈 당한 292고지에는 유개엄체의 특화점진지가 구축되어 있었다. 따라서 김종훈 대위의 지휘하에 정면으로 공격하던 제2대대는 7부 능선까지 진출했음에도 노출된 경사지형으로 인해 진퇴양난에 빠졌고, 무모한 희생자를 내지 않기 위해 철수하였다. 하사관 교육대 역시 공격을 할 수 없게 되어 철수함에 따라 11시 30분 경 아군의 공격은 완전 좌절되었다.
    그러자 연대장 이하 각 대대장 및 참모들은 대책을 논의한 끝에 북한군의 특화점인 토치카를 파괴하기로 하고 육탄공격만이 가능하다고 결정했다. 이런 결정에 따라 하사관 교육대에서는 사단 시설장교인 박후준(朴厚俊) 소위의 고안에 의해 81㎜박격포 포탄에 폭약을 장치한 육탄공격용 포탄이 준비되고 있었다.
이날 정오 연대장 최경록 중령은 작전명령을 하사관 교육대에 하달했다. '하사관 교육대는 292고지를 완전 확보하며, 그 일부 병력으로 비둘기고지를 점령하고 유엔고지의 적 특화점을 격파한 후, 계속 빙고동 부근의 적과 증원하는 적을 봉쇄하라.'
    그러나 명령이 하달되기 직전인 12시경에 중화기소대 분대장인 박창근(朴昌根) 하사는 292고지 동북방 150m 지점에 위치한 토치카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받고 김부태(金富泰) 이등중사, 김막동(金莫同) 일등병과 함께 수류탄을 가지고 적진으로 돌입해 투척했으나 거리관계로 실패한 채 후퇴했다. 그러나 박 하사는 부여된 임무에 책임을 다하기 위해 다시 수류탄을 쥐고 단신으로 적진에 돌입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전사하고 말았다.
    한편, 좌측의 공격제대를 지휘하다가 연대장의 작전명령을 받은 김영직 대위는 즉시 적의 토치카를 파괴할 특공대 편성을 결심하고 전 대원에게 훈시를 했다. 그러자 하사관 교육대 제1소대장 김성훈(金誠勳) 소위와 전 소대원을 비롯하여 수많은 용사들이 특공대에 지원하였다. 그러나 지원순으로 1분대장 서부덕 이등상사를 비롯한 이희복(李熙福) 일등병, 박평서(朴平緖) 일등병, 황금재(黃金載) 일등병, 윤옥춘(尹玉春) 일등병, 김종해(金鍾海) 일등병, 윤승원(尹承遠) 일등병, 오제룡(吳濟龍) 일등병, 그리고 양용순(梁龍順) 일등병 등 9명이 최종적으로 결정되었다.
    김영직 대위는 도상(圖上)으로 지형을 설명하고 난 후 특공대원들에게 각각의 임무를 부여했다. '서부덕 상사는 적의 제5토치카, 이희복 일등병은 제2토치카, 윤승원 일등병은 제3토치카, 박평서 일등병은 제4토치카, 황금재 일등병은 제6토치카, 양용순 일등병은 제7토치카, 윤옥춘 일등병은 제8토치카, 그리고 오제룡 일등병은 제9토치카를 각각 파괴한다. 아울러 서부덕 상사가 특공대를 지휘할 것을 명한다!' 이어 그는 특공대의 출동시간을 13시 30분, 특공대의 진출을 위한 엄호포격은 13시 30분부터 시작해 14시 정각에 멈춘다고 말했다. 9명의 특공대는 적의 토치카를 파괴할 육탄공격용 81㎜ 포탄 하나씩을 지급 받았다.
    13시 30분! 포탄을 가슴에 안은 대원들은 김 대위 및 전우들의 격려를 받으며 진지를 출발했다. 특공대원들은 아군의 엄호 포성을 들으며 엄폐물과 은폐물을 이용해 유엔고지의 각 목표물을 향해 나아갔다. 무사히 적 토치카 300m 전방까지 접근한 대원들은 포복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특공대원을 발견한 적은 모든 화력을 집중해 대원들의 접근을 막기 시작했지만 필사적으로 전진하는 대원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14시 정각, 아군의 모든 지원사격이 정지되었다. 잠시 후 '전 대원 돌진하라!'는 서부덕 이등상사의 명령과 함께 모든 특공대원들은 일제히 필승의 함성을 울리면서 각자에게 부여된 토치카를 향해 돌진해 포탄을 안고 뛰어들었다. 그 순간 여기저기서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과 함께 9개의 토치카에서 검은 연기와 화진이 하늘로 치솟았다.
    평범한 짧은 생애를 영원한 생명과 바꾼 특공대원들의 충정어린 육탄공격이 성공하자 후방에 대기하고 있던 하사관 교육대는 비둘기고지에 육박공격으로 14시에 이를 점령하였고, 김종훈 대위의 공격부대도 유엔고지를 무난히 점령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292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4일간의 치열한 전투를 계속한 후 송악산 동쪽 연봉 위에 일제히 태극기를 게양했다. 이로써 송악산 전투는 6일 만인 1949년 5월 8일 종식되었으며, 38도선 진지를 원상으로 회복할 수 있었다.
    이 전투에서 아군은 적 1개 중대 137명을 사살하는가 하면 기관총과 다발총 114정 및 다수의 실탄을 노획하였으며, 적의 토치카 10개소를 폭파하는 대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제11연대도 제2대대장 김종훈 소령, 하교대장 김영직 대위, 하교대 제1소대장 김성훈 소위, 그리고 서부덕 이등상사 외 9명의 육탄용사, 26명의 사병들이 전사했다.
    1949년 5월 20일 육탄10용사에 대한 합동위령제가 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되어 윤옥춘 일등병은 육군 일등상사로 특진하였고, 1950년 12월 30일에는 을지무공훈장이 추서되었다. 그리고 육탄 10용사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1956년 5월 4일 국민의 성금으로 서울 흑석동 한강변에 전공비를 세워 이들을 추모하고 있다. 그 추모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해방 이후 38선으로 말미암아 국토가 분단되어 오던 중 단기 4282년에 이르러서는 개성 서북방 송악고지에 공산 괴뢰군이 불법 침입하여 방위가 불리하고 개성이 위태로움에 동년 5월 4일 제1사단 제11연대 소속 서부덕 소위 이하 9명의 용사가 화랑정신을 받아 조국애와 민족정기에 불타는 정열로 몸에 포탄을 지니고 적의 지하참호 속에 뛰어들어 육탄혈전 적진을 분쇄하고 옥으로 부서지니 멸공전 사상에 이룬 공과 그 용맹이 널리 세계에 퍼지다. 광음이 흘러도 잊음없이 명복을 빌고 그 영령을 추모하고저 이에 눈물과 정성으로 현충비가 서나니 이는 자국 수호의 정신을 청사에 새기고 만대에 전함이다. 10용사의 영혼 불멸하여 겨레와 함께 살며 길이 빛나리로다.'



* 참고문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태극무공훈장에 빛나는 6.25전쟁 영웅, 2003
국방부, 자유민에게 전해다오 제1집, 1955
육군본부, 한국의 전쟁영웅들, 1992
이원복, 호국용사100선, 명성출판사,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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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임실-남원지구 전투

요 약 정 보
 
● 전투시기 : 1950.7.20-7.24
● 전투지역 : 전북 임실, 남원
● 주요지휘관 : 신태영 소장, 유해준 중령
● 참고문헌 : 한국전쟁사(국방부), 한국전쟁사(전쟁기념사업회)
상 세 설 명
 
1. 전주-임실-남원지구 전투의 개요

  호남으로 진출한 적 제 4사단(사단장 소장 이권무)은 월등한 화력과 병력으로 경찰과 새로 편성된 부대로 구성된 서해안지구 전투사령부(사령관 소장 신태영)가 지키고 있는 전라북도 전주-임실-남원지구로 침입해 들어왔다.
  열악한 장비와 병력으로 전차를 앞세운 적의 막강한 화력을 막아내던 아군은 끝내 전주-임실-남원지구를 적의 손에 빼앗기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2. 전주-임실-남원지구 전투의 주요 지휘관

*아군
서해안지구 전투
사령관 소장 신태영(겸 전북편성 관구 사령관)
신편 제 7사단장 대령 민기식
제 3연대장 중령 박현수
신편 제 9연대장 중령 유해준
신편 제 30연대장 김용주
육본특공대장 소령 배동인
기갑연대 기병중대장 중위 박익균
고길훈부대(해병)장 소령 고길훈(7. 22에 김성은 부대로 개칭)
김성은부대장 중령 김성은
민부대장 대령 민기식(7. 20에 개칭)
독립대대장 소령 김병화(7. 20에 김부대로 개칭)
오부대장 대령 오덕준
전북경찰전투사 사령관 경무관 윤기병
전북지구편성관구 사령관 소장 이응준
신편 제 5사단장 대령 이형석
신편 제 15연대장 중령 김병휘
이부대장 중령 이영규
신편 제 26연대장 중령 이백우
전남경찰전투사 사령관 경무관 이응권

*적군
제 4사단장 소장 이권무
제 16연대장 대좌 박승희
제 6사단장 소좌 방호산
제 13연대장 대좌 김후진
제 14연대장 대좌 한일래
제 15연대장 대좌 김현기
포병연대장 중좌 박해민



3. 전주-임실-남원지구의 진행과정

  7월 20일
  이날 새벽에 승세를 몰아 방향을 전주 및 광주에 이르는 양개 도로를 따라 지향함으로써 이리에서 전주로 축차로 물러나게 된 군경부대는 이를 저지할 상황이 되지 못하여 임의로 지연전을 펴면서 남원을 목표로 후퇴하기에 이르렀다. 전날 밤부터 전주를 공격하기 시작한 적은 심야에 이르러 그 병력이 더욱 증강된 듯 아군진지에 포화를 집중하기 시작하였다. 이렇듯 적 포탄이 작열하는 가운데 전주를 방어하던 군경부대는 이날 02:00를 기하여 예정대로 축차로 진지에서 이탈하여 철수의 길을 재촉하게 되었다.
  이 때에 부산-참례-잔주 도를 따라 물러나면서 지연전에 참가한 바 있는 경찰 1개 중대는 흩어진 병력을 수습하면서 지정된 밖슬재를 점령하고 전북 경찰 혼성 병력 2개 중대 규모는 03:00에 용운재(임실 북족 2.5km)를 점령하고 병력을 전개하여 아군의 철수를 엄호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서해안 지구 전투 사령부가 남원으로 이동하였으며 또 신편 제 7사단 독립 대대와 기병 중대가 사령부를 따라 물러났으나 이 철수에서 민기식 대령은 신편 제 7사단 사령부 요원들과 같이 전주에 있는 각 은행보유화폐의 반출을 주선하고 아울러 그간 낙오병과 국군입대를 자원한 장정을 모아 훈련한 바 있는 200명을 인솔하기로 하였다.
  따라서 적은 이날 04:00부터 전주 시내에 돌입하여 이를 강점하였는데 이때에 전황을 알지 못한 채로 시내에 잔류한 대부분의 시민들은 적에 의하여 구금상태에 빠지는 비운을 맞이하게 되었다. 적은 여기를 점거하자 추산 1개 연대 규모의 병력을 임실로 통하는 국도 상에 투입한 듯 12:00에 임실 북쪽에 선발대로 보이는 한 무리가 섬진강 상류를 도하하고자 시도하였다. 그런데, 적은 섬진강 상류 남안에서 곧 철수하고 더 이상의 남침을 중지한 듯 하였으나 그 까닭은 분명치 아니하다.

  7월 21일
  흐리고 비가 내리는 날씨가 계속되는 가운데 이날은 특히 기상이 악화되어 우군 항공기가 출격치 못하였다.
  당면의 적은 이날 09:00부터 탐색전을 벌이는가 하더니 야음과 더불어 공격을 재개한 듯 섬진강 상류를 도하하여 경찰만이 배치된 진지를 압박하므로 이를 감당할 처지가 못 된 경찰 혼성부대는 접적만을 유지하였을 뿐 또다시 수의로 물러나게 되었다.
  1500명의 신병으로 부대를 새로 편성하여 훈련에 정진하고??????????????헇벼퇇딠?? 있던 동연대(연대장 중령 김용주)는 이날 적침이 임박하자 민기식 대령으로부터 『후방 지역으로 이동하라.』는 목표없는 후퇴명령을 받았다. 당시에 연대는 제 3, 9, 15, 26의 4개 연대가 동월 17일에 육군본부에서 제 1~제4교육대로 개칭되는 조치에서 벗어났으므로 그대로의 명칭에 있었는데, 그 편성은 3개 대대로 구성되어 제 1대대장에는 강인로 소령(겸 부연대장)이, 제 2대대장에는 김광정 소령이, 그리고 제 3대대장에는 박관영 대위가 각기 임명되어 있었다. 연대는 이 철수명령을 수령하자 곧 부대 이동준비를 완료하고 보급품을 자동차로, 각대는 도보로 이동키로 하고 이날 오전 중에 남원을 떠나 구례 경유 진주로 향발하였으니 이들이 구포에 도착한 것은 동원 28일이었다.

  7월 22일
  이날도 당면의 적은 정읍을 지향하는 듯 하였으나 피아간에는 섬진강을 중심으로 소규모의 탐색전만이 계속되었다. 이런 가운데 해병 1개 대대가 별명으로 여수에 상륙하여 민부대를 부원케 되었다.
  20일에 전주를 수중에 넣은 다음 계속 광파를 남원 쪽으로 몰아붙인 당면의 적은 이날도 역시 임실 북쪽에서 아군의 동정에 관하여 주시하는 듯 큰 규모의 침공은 없었는데, 정읍으로 지향한 적의 공파는 14:00에 태인(정읍 동북쪽 11km)을 유린한 다음 정읍을 노렸으며, 동시에 신태인(정읍 북쪽 11km, 태인 서북쪽 5.5km)에는 군산 및 이리로부터 남하한 것으로 보이는 기갑부대를 포함한 북한군 제 6사단 주력이 집결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16:00에는 김제에서 남침한 것으로 보이는 1개 중대규모가 고부(정읍 서쪽 8.5km)에 돌입하므로 이곳을 방어하던 경찰대와 격전을 전개한 끝에 17:00에는 드디어 이곳을 점거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이날 덕유산 일대에서 출몰하던 공비 2개 중대 규모가 진안(전주 동쪽 24km)을 습격하였으나 여기를 지키던 경찰대는 사기가 극도로 저하된 채 일전도 시도하지 못하고 장수(임실 동북쪽 21km)로 철수하는바 되었다.
  이상과 같은 적정으로 미루어 보건데 호남 지역을 공략한 적은 우선 주력으로써 광주를 침탈하고 이어서 남해안을 우회하여 순천 서쪽 일대에 진출할 때까지 다른 무리를 임실 북쪽에 배치하였다가 남원-순천 간의 아군 측방을 동시에 공격하려고 기도하고 있음이 분명하였다.
  그러나 아군 지휘부는 이와 같은 적정 분석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기도를 분쇄할 근본적인 대책이 없었던 까닭에 전황은 적이 주도하는 바에 따라가는 악순환만을 거듭하였다. 이날 08:00에 서해안 지구 사령관 신태영 소장은 보원 부대의 내착에도 불구하고 당면의 적정으로 미루어 현 병력으로서는 적침을 저지할 방도가 없다고 판단한 결과 현 전선에서 가능한 한 지연토록 하다가 사불여의하면 덕유산-지리산-백운산을 연하는 선으로 물러나 험준한 지세를 이용코 유격전으로 이행키로 결심하였다.
  이때의 신태영 소장의 관할 하에 있는 서부전선은 대체로 무주(임실 동북쪽 35km)-진안-임실-정읍-고폐를 연결하는 형세를 보였으나, 적이 실제로 배병된 곳이란 임실 정면과 정읍 두곳만으로서 그 나머지는 거의 개방된 실정이였으며 그나마 정읍 정면의 상황은 정확히 알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더구나 전북 지구의 상황이라 할지라도 무주-진안-장수(진안 서쪽 20km)부근은 행정 경찰만이 지역 방어에 임하는 까닭에 그 취약성이 비할 데 없었다.
  당면의 전황으로 보아 이 전선의 지구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인데, 그것은 국군의 주력과 미군이 배치된 동부와 중부전선의 서측방에 해당하는 이곳이 노출된 경우, 전세가 급전될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에 이의 엄호는 아군작전상의 긴박한 요청이기도 하였다.
  이에 그는 임실 동쪽에서 지역 방어에 임하는 경찰과 이를 지원할 것으로 예상되는 미군을 우지구대로, 민부대를 좌지구대로 분류하면서 요지 다음과 같은 서해안 지구 전투사령부 작명 제 1호를 하달하였다.

●작전명령 제 1호

『① 서해안 지구 전투부대는 군주력방면의 공세를 조성하기 위하여 그 서측익을 엄호하려 한다.
② 우지구대(경찰 부대 및 미군 일부)는 진안 북쪽 및 그 서쪽 고지 일대를 점령하여 당면의 적을 저지한 다음 축차로 지연전으로 이행하면서 장수 쪽으로 견제 억류하라.
③ 좌지구대(민부대, 이영규 부대)는 민부대 지휘 하에 임무 북쪽 고지선을 점령하여 서쪽으로부터의 적을 침투를 견제 하면서 당면의 적을 저지하라. 부득이할 경우 지연전을 펴 남원-운봉에서 축차 진지를 점령한 연후에 함양 서쪽을 고수하라.
④ 해병대대는 함양에서 별명을 대기하라.
⑤ 여는 함양에 위치할 것이다.』

  이때에 여수에 상륙한 해병대(고길훈 부대)는 이 명령을 받지 못한채로 다만 해군본부 작명에 따라 행동하고 있었다.
  남원역에서 승차한 채로 밤을 새운 이영규 부대는 민기식 대령으로부터 당면의 적정을 설명 받아 이날 08:30에 또다시 임실 북쪽으로의 열차운행으로 북상케 되었으나 이때의 상황은 임실까지 운행이 가능하였으므로 그 이상은 북진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부대는 임실에서 전원 하차하여 용운재 일대를 점령하였는데, 이때 여기에 진지를 점령하고 있어야할 경찰 혼성 부대의 소재를 알지 못하여 합세할 수가 없었다.
  이 후에 부대는 적의 대 규모 침공이 없었으므로 계속 진지를 점령하면서 종일 적 수색에 나섰으며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피아가 서로 대치하게 되었다.

  7월 23일
  이날 당면의 적은 주력으로 하여금 정읍으로 곧장 가게 하려는 가운데, 임실 정면에서는 견제에만 치중한 듯 하므로 전주-임실 국도 부근의 전황은 커다란 변동이 없었다. 민기식 대령은 이날 여수로부터 보원한 해병대와 또 부산에서 서북진한 오덕준 부대를 의명 통합 지휘하게 되자 적을 반격코자 명령을 하달하였으므로 아군 상황은 대체로 이들의 부대기동이 주가 되었다.
  전날 여수에 상륙하여 출동 준비를 마친 김성은 부대는 이날 03:00에 열차 편으로 출발한 다음 10:20에 남원에 진출하였다. 그런데 이리 전투에서 실종된 김한수 소위와 4명이 적에게 사로잡혀 후송되는 도중에 적지를 탈출하여 남원으로 복귀하였으므로 이를 수용하고 적중돌파의 노고를 위안하였다.
  이리하여 민기식 대령으로부터 명령을 대기하였던 바 16:00에 전기 반격 명령을 수령하게 되자 부대는 다시 열차 편으로 17:00에 떠나 1시간 뒤에는 오수리(남원 북쪽 13km)에 이른 다음 적정이 없으므로 임실을 목표로 북진하였는데, 부대가 임실에 당도한 것은 다음날 01:20이었다.
  육군본부는 호남 지역에서의 전황이 악화되기에 이르자 동월 20일 당시에 경남편성 관구 사령관 이종찬 대령에게 『보병 1개 대대를 남원에 급파하라.』는 요지의 명령을 하달한 바 있음은 전술한바 같거니와 이러한 조치로 급편 된 부대가 오덕준 부대였는데, 이 부대가 해병대에 이어 이날 15:00에 남원에 진출하여 서해안 지구 전투사령부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본시 이 부대는 동월 7일에 제 5, 7사단이 광주와 전주에서 신편될 대를 같이하여 부산에서 신편케된 제 9사단(사단장 이종찬 대령)을 모체로 탄생된 부대로써 당시에 그 예하에 있는 제 23연대(연대장 임유성 중령)가 부산에서, 제 27연대(연대장 김익열 대령)가 마산에서 신병을 모집하여 각기 편성중에 있었다. 이때 육군 본부로부터 구두명령을 받아 동 사단의 참모장으로 부임한 오덕준 대령은 곧 전기작명을 수령하였으므로 동월 17일에 육군본부 조치에 의거 제 8교육대로 호칭케 된 제 23연대의 정찰병력, 퇴원자 그리고 학도병중에서 650명을 선발한 다음 홍정룡 중령을 대대장으로 하여 4개 중대를 편성하고 홍석표, 김정서 양 대위 등을 중대장에 보하였으며, 손관도, 예철수, 이준학 세 소령 등을 각기 참모로 부서한 바 있었다.
  이리하여 부대는 부산 창고에 보관중인 M1소총으로 무장하고 징발차량 20대에 분승하여 동월 21일에 마산으로 향발하였다. 부대는 이곳에서 제 9교육대로 명명된 제 27연대 병력중의 일부를 뽑아 보충하고 다음 날인 22일에 열차편으로 진주에 진출하여 하루를 보낸 다음 이날 진출한 것이다.
  그러나 부대원의 자질은 충분한바 못되어 진주 재편시에는 병력이 1000명에 달하였으나 이동중에 많은 이탈자를 보게 된 듯 남원 진출시에는 그 병력이 700명 선을 상회하였다.
  민기식 대령은 오덕준 부대의 ??????????????헇벼퇇딠??지원을 얻자 이날 지체 없이 회심의 반격전을 결행키로 결심한 것이지만 장병들의 피로도를 고려하여 우선 예비로 남원에 배치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남원에서의 정황은 한때 활기에 차있었으나 전남 지구에서의 상황이 각각으로 악화되어 이날 17:00에 광주가 적수에 떨어지고 계속 그들의 추봉이 화순(광주 동남쪽 10km)과 나주(광주 서남쪽 20km)를 지향하였으며, 또한 그의 일대는 장성(광주 북쪽 16km)에서 분진하여 2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담양(장성 동쪽 17km)에 침입한 다음 남원을 직충코자 정찰을 하고 있었으니, 이들이 임실정면에서의 적과 서로 호응한다면 남원 또한 지탱키 어려운 상황으로 일변하게 될 것이다.

  7월 24일
  이날을 전후하여 당면의 적은 공세로 이전하여 양면에서 남원을 압박하므로 민부대는 결국 계획한 반격을 한번 펴보지도 못한 채 저지전으로 전환하다가 마침내 예봉으로 물러서게 되었다. 이부대는 이날도 전날에 이어서 섬진강 남쪽 고지 일대를 점령하고 당면의 적과 대치 중이었는데, 적은 불소에 이르러 종전가지의 침묵을 깨고 돌연 화력을 발휘하면서 도처에서 강을 건너 공격 태새를 취하므로 이 사실을 민부대장에게 보고한 다음 우세한 적에게 압도된채로 접적을 유지하면서 간조에 오수리로 물러나게 되었다. 이리하여 부대는 여기에서 분산된 병력을 수습코자 하였으나 곧 이어 속행되는 적의 추격으로 말미암아 급거 남행 열차편으로 남원 경유 구례로 물러나는바 되었는데, 이때가 대체로 09:00였다.
  이때에 민부대와의 통신의 두절로 남원의 상황은 알 길이 없었으며 따라서 그 뒤의 부대행동은 수의에 맡겨지는바 되어 자연 민부대장의 지휘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김성은 부대는 임실로 진출하는 즉시로 진지를 점령키로 하였는데 이날 02:00에 남원에 위치한 민부대장으로부터 공격 중지 명령과 동시에 즉시 남원으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부대는 적과 일전도 시도하지 못하고 다시 열차편으로 04:00에 남원에 환도하였는데, 이때에 오덕준 부대는 정창으로부터 남원으로 침공하는 적을 저지코자 출격하여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고 있었다.
  한동안 남원역에서 대기하던 김부대장은09:00에 민부대장으로부터 구두명령을 받았는데, 그 요지에 이르기를 『귀 부대는 즉시 남원 동북쪽 고지 일대를 점령하고 철수하는 부대를 엄호하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김성은 부대는 곧 목표인 동북쪽 고지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들이 목표의 진지를 점령하려는 찰나에 적의 포성이 들려왔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민부대 주력은 남원을 뒤로 하고 퇴각을 재촉하기 시작하였는데 일문의 포도 보유하지 못한 군대의 비탄이 과연 어떠하였으랴.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해병 부대가 200고지~52고지(남원 북쪽 2km)를 점령하였을 때에는 민부대의 주력이 남원에서 이미 물러나게 되었으며 정창으로부터 침습한 그들의 선봉이 이미 남원 일각에 나타나고 있었다. 이에 따라 해병 부대는 이미 엄호의 임무를 달성하였으므로 축차로 물러나 운봉(남원 동쪽 12km)을 목표로 강행군하게 되었다. 이때에 부대는 30도를 넘는 더위를 극복하고 30리의 산길을 넘었으며 운봉에 당도하게 된 것은 이날 13:40이었다.
  민부대의 상비대로서 남원에 배치된 오덕준 부대는 이날 01:00에 민기식 부대장으로부터 『임실에 진출하여 공격부대를 증원하라.』는 요지의 명령을 받자 곧 대기하는 차량에 분승하여 임실을 목표로 북진케 되었다.
  그러나 부대가 오수리를 지나고 있을 무렵에 추달된 명령에 이르기를 『적이 광주로부터 하동으로 진출하니 그 방면을 막으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즉시 서원으로 환도하였는데, 이때에 손관도 소령이 적의 전화를 도청한 결과 그들이 정창으로부터 침습하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부대는 적을 선제공격하기 위하여 곧 상동리(남원 서쪽 3.5km)로 급파하여 병력을 전개한바 적은 장갑차를 앞세우고 도로를 따라 유연하게 남원으로 지향한 듯이 진격하는 것이었다.
  부대는 곧 이들에게 화력을 집중하여 많은 손실을 주었으나 그들도 또한 완강성을 보였으므로 교전 1시간만에 부대는 ??????????????헇벼퇇딠??결국 이들의 상대가 되지 못한 까닭으로 사수하는바 되고 장교의 호령과 저지에도 아랑곳없는 가운데 삼삼오오로 운봉방향으로 퇴각하는바 되었다. 병력과 화력에 있어서 현격한 차가 있을진대 그 싸움의 결과가 곧 계란으로 바위치기가 된다는 것은 어찌할 도리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4. 전주-임실-남원지구 전투의 결과

  7월 24일에 남원이, 다음날인 25일에는 구례와 순천을 그리고 26일에는 여수를 차례로 상실하게 되어 적선은 또다시 경남지역으로 물러나는바 되었거니와 이때(26일) 또한 북쪽인 장수가 소수 경찰의 액수 속에 제 4사단(사단장 이권무 소장)의 침공을 받고야 말았다.
  이로 말미암아 북한군은 서남부 전선에서 호남과 영남의 지경을 이루는 덕유산(1508 고지)-지리산(1918 고지)-백운산(1218고지)선으로 진출하였으며 다음으로 이 험준한 지세를 가로지르는 4개의 통로인 장계리(전주 동쪽 31km)-안의(함양 북쪽 11km)와 남원-운봉-함양 및 구례-하동, 순천-안동 등을 침로로 삼아 영남 지역으로 침공할 발판을 굳치게 되었다.
  이에 이르자 그들은 낙동강 북쪽과 서쪽 지역으로 급속히 진출키 위한 이른바 제 4차 작전(7. 21~8. 20)을 완수코자 장계리-안의 사이 침로에 새로이 그들 제 4사단을, 여타의 그 남쪽 침로에는 전주-광주 등 호남지역을 석권한 제 6사단(사단장 방호산 소장)을 계속 전개하고 일기에 마산-부산으로의 침공을 획책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덕유산-지리산-백운산 선은 공격자와 방어자간에 중요한 요충이 된 셈인데, 당시의 아군 배치는 장계리-안의 간에 단 일병의 배치도 없었으며, 남원-운봉-함양 간에는 남원으로부터 열세를 만회하지 못하고 축차로 물러난 연대규모의 민부대(김승화 부대, 오덕준 부대, 김성은 부대 통합 지휘)가 접적만을 유지하는 실정이었다. 또한 구례-하동간은 이영규 부대가 소수의 병력으로 지연전을 감행하였으며, 순천-하동 간은 완전히 개방된 실정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육군본부는 속수무책인 채로 동월 25일 16:00에 작명 제 70호를 하달하고 전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을 영남서부지역으로 급파하여 민기식 부대와 이응준 부대를 통합 지휘토록 한 다음 영남 지역으로 침입하는 적을 저지 격멸케 하는 임기를 편법을 썼던 것이다.

충혼불멸탑

 

 

 

요 약 정 보
 
● 위치 : 임실군 임실읍 이도리 369
● 건립일자 : 1956. 7. 1.
● 시설제원 : 경역면적 3300
㎡, 기단높이 1m, 탑높이 2m
● 관리기관 : 임실군
● 참고문헌 : 전적기념물편람집(국방군사연구소)
상 세 설 명
 
ㅇ개요

위치 : 임실군 임실읍 이도리(향교부락)
1950년 6.25 전쟁 전후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희생한 호국영령을 추모하고 이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대대손손 역사로 기록하기 위해 1956년 7월 1일 임실 동중학교 뒷편 봉황산에 충혼불멸탑을 건립하여 55년간 추모행사 및 현충시설로 관리하여오다 조국수호에 신명을 바치신 분들의 공훈을 더욱 드높이고 숭고한 정신을 선양하고자 임실군에서 더 넓은 장소를 마련, 임실 공설운동장 옆에 국가 유공자 기념공원을 조성하여 2011년 6월 30일 이곳으로 이설하였다.

시설물: 충혼불멸탑,국가유공자 기념탑, 국가유공자의 탑, 월남참전 유공자의 탑, 6.25 참전 유공자의 탑



ㅇ건립취지 및 유래


   한국전쟁 중 민족과 국가를 위해 싸우다 거룩하게 산화한 군경 995위의 영혼을 추모하기 위해 조형물을 건립하였다.



ㅇ비문내용


사랑하는 젊은 영혼들이여. 그대들 조국의 거룩한 향기요. 꽃이었노라. 목숨을 깨쳐 나라를 위하였고, 용기를 살려 역사를 빛나게 하였음을 겨레는 우러러 찬양하노라. 그들은 죽었으나 더욱더 살았고 형상을 잃었으나 민족의 심혼에 여윈 그 업적 어찌 천대만대에까지 잊어짐 있으랴. 태양과 별이 그대들의 안식을 영원히 위로할 것이며 우리 겨레 피 속에 스르는 역사의 승리 속에서 그대들은 길이길이 안기어 멸하지 않으리니 995주의 영령이여. 여기 겨레의 땅에 고이 쉬소서.



ㅇ임실군 인문지리


   전라북도 중남부에 위치한 군이다. 동쪽은 진안군·장수군·남원시, 서쪽은 정읍시, 남쪽은 순창군, 북쪽은 완주군과 접하고 있다. 면적은 서울시보다 약간 작은 596.97㎢, 인구는 2001년 현재 3만 7514명이다. 임실읍과 청웅면·운암면·신평면·성수면·오수면·신덕면·삼계면·관촌면·강진면·덕치면·지사면 등 1읍 11면의 행정구역을 이룬다. 군청은 임실읍 이도리에 있다.
   노령산맥의 동쪽 비탈에 있어 산이 많다. 농사를 짓는 땅이 전체의 15.5% 정도에 지나지 않으며, 한 집당 경지면적이 전라북도에서 가장 적다. 경지면적 중 논이 67.7%, 밭이 32. 3%로 논농사 중심이며, 평야는 오수천 근처인 오수면 일대에 가장 넓게 발달해 있다. 쌀·보리 등의 주곡작물과 고추·무·배추·잎담배·인삼 등이 생산된다. 특히 고추는 전국적으로 유명하며, 산간지역에서는 무·배추의 고랭지농업이 행해진다. 최근에는 시설원예농업도 활발해 임실읍에서는 화훼가, 성수면에서는 딸기가 온실에서 많이 재배된다. 오수면 주천리 일대에 대규모 화훼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한편 임실읍은 우리 나라 최초로 1968년에 치즈공장이 설립된 곳으로 일찍부터 축산업이 발달하였다. 젖소 사육은 1978년에 관촌 부근의 신평면 대리에 대규모 우유가공공장이 세워지면서부터 널리 보급되어, 관촌면·임실읍·성수면의 많은 농가에서 사육하고 있다. 공업발달은 미약한 편으로, 1980년대 말부터 신평·오수 농공단지가 세워져 있다.
   군의 동부를 전라선 철도와 전주∼남원 국도가 나란히 통과하고, 임실읍에서 순창∼진안 국도가 교차한다. 산간지대이고, 갈담저수지에 의해 도로가 끊겨 교통이 매우 불편했던 군의 서부지역은 1989년 운암대교가 세워지면서 완주군 구이면을 거쳐 전주로 통하는 전주∼순창 국도가 연결됨으로써 교통이 편리해졌다. 임실군의 인물로는 고려 공민왕 때 문하시중 이능간, 임진왜란때 싸운 신개, 조선 말 의병장 이석용, 김상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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