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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향 임실/임실군 자료

청구요람(靑邱要覽)-임실군 1834년

by 임실사랑 2012. 1. 1.

 

김정호가 만든 『靑邱圖』의 異本은 현재 9개 남아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으며, 내용적으로는 3개의 유형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 중 본 『청구요람』(古4709-21A)은 乾?坤 2권으로 되어 있으며, 남북으로 총 29층, 동서로는 22판으로 구분되어 있다. 乾권에는 홀수층이, 坤권에는 짝수층이 수록되어 있다.
각 층판의 면은 남북 100리와 동서 70리의 동일한 크기로 나누어져 있으며, 각 책의 크기는 세로와 가로가 31.5cm×21.5cm이다. 이 중 제26층과 제27권에는 아무런 내용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乾권의 맨 앞쪽에는 甲午년인 1834년(순조 34)에 최한기 (1803-1879)가 쓴 『청구도』의 서문인 ‘靑邱圖題’가 붙어 있다.
그러나 ‘청구도제’의 중간에 몇 문장이 다르게 쓰여있는데, 조협승이 최한기가 소장하고 있는 『청구도』를 보고 감탄하여 從遊者인 韓承履와 韓秉華에게 모사하여 완성하게 했다는 내용이다.
‘청구도제’의 문장 끝에는 “乙未八月曺協承書”로 기록되어 있어 1895년(고종 32)에 조협승이 최한기가 쓴 서문을 마치 자기가 쓴 것처럼 꾸민 것을 알 수 있다.
원래의 ‘청구도제’의 끝에는 대부분 최한기가 쓴 것이 명기되어 있다.
『청구요람』에는 김정호의 ‘靑邱圖凡例’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과 본 지도책의 것이 거의 동일하여 최한기가 소장하고 있던 김정호의 『청구도』 최종본의 원본에 가깝다고 판단된다.
몇몇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산줄기로 표현하지 않고 단지 산의 봉우리만 그려넣는다고 했는데, 본 지도책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다. 『청구도』의 초기본 계통에는 산줄기로 표현한 것이 있다.
둘째, 東方諸國圖?三韓圖?漢四郡圖?三國圖는 여러 사람의 고증이 온당치가 못해 삭제한다는 내용이 있는데, 본 지도책에는 앞의 지도들이 없다.
『청구도』의 초기본 계통에는 동방제국도와 사군삼한도 및 삼국도가 수록되어 있다.
셋째, 戶口?田結?穀總?軍丁 등을 순종 무자년(1828) 備局都錄을 기초로 기입해 넣는다고 했는데, 본 지도책에는 모두 수록되어 있다.
『청구도』의 초기본 계통에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기록되어 있지 않다. 넷째, 京까지의 거리를 적어넣는다고 되어 있는데, 본 지도에는 모두 적혀 있다.
『청구도』의 초기본 계통에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섯째, 京은 특별히 중요하여 五部全圖를 첫머리에 기록한다고 했는데, 본 지도책에는 있다.
『청구도』의 초기본 계통에는 오부전도가 없다. 이런 측면들을 고려해 볼 때 본 지도는 ‘청구도범례’가 작성되면서 제작된 『청구도』최종본에 가까운 것으로 추정된다.
앞에서 언급하지 않은 본 지도책의 특징을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청구도』의 앞쪽에는 索引圖의 역할을 하는 〈本朝八道州縣圖總目〉, 뒤쪽에는 통일신라시대의 〈新羅九州郡縣總圖〉, 고려시대의 〈高麗五道兩界州縣總圖〉이 수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색인도는 현재까지 전해진 지도책 중에는 『청구도』가 유일하기 때문에 김정호 스스로 창안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 『청구도』에는 다양한 역사 정보가 수록되어 있다.
1. 신라 이후 각 군현 명칭의 변화를 邑治 주위에 신라는 ‘羅’로, 고구려는 ‘勾’로, 백제는 ‘濟’로, 고려는 ‘麗’로 구분하여 적고 있다.
2. 古縣의 명칭을 대부분 수록하고 있다. 3. 과거의 전투 기록 등 당시로서는 중요한 여러 역사정보를 해당 장소에 간략하게 적고 있다.
『청구도』에 수록되어 있는 地誌的 내용 중의 하나는 자연지리적 정보가 간략하게 해당 장소에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셋째, 범례의 종류라는 측면에서 보면 『청구도』는 『조선지도』나 『해동여지도』 및 『조선도』 등에 비해 상당히 후퇴한 느낌을 주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관찰해 보면 꼭 그렇게 볼 수 없는 부분도 많다.
1. 郡縣 읍치의 경우 세로로 길고 큰 사각형을 통해 정보를 통일시켰지만 안쪽에 고유 명칭 두 자를 적어놓아 다른 군현과 구별할 수 있도록 하였다.
더 나아가 군현 사이의 격의 차이를 표현하기 위해 사각형 아래나 오른쪽에 牧(使), 府(使), (郡)守, (縣)監 등의 한자를 한 자씩 써넣었다.
2. 鎭堡의 경우 작은 정사각형을 통해 정보를 통일시켰지만 안쪽에 파견된 관리 명칭의 첫 글자를 넣어 등급을 구별하였다.
3. 兵營, 水營, 統營, 각종 營은 세로 또는 가로로 긴 작은 사각형 안에 명칭을 적어 넣었다.
4. 驛?面?倉?牧場은 鎭堡와 동일한 크기의 사각형으로 범례화시켜 혼동을 줄 수 있게 그려져 있지만 안쪽에 驛?面?倉?牧이라는 글자를 써넣음으로써 구별할 수 있도록 하였다.
監牧官이 파견된 牧場의 경우 세로로 긴 작은 사각형 안에 ‘牧所’를 써넣어 구분하였다.
5. 해당 면에 읍치가 표시되어 있지 않은 지역과 越境地처럼 어느 고을의 땅인지 분명하게 이해할 수 없는 경우 가로 또는 세로로 긴 작은 사각형 안에 ‘○○地’라고 표시하여 구별할 수 있도록 하였다.
6. 烽燧는 불이 타오르는 삼각형 모양으로 그려져 있다. 이외에 도로가 홍색 실선으로 표시되어 있는 점도 눈에 띈다.
넷째, 청구도범례에 나타나 있는 地圖式은 다른 지도책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다.
따라서 그 동안 지도식을 『청구도』 자체를 그렸던 방법으로 이해하기도 했다. 지도식은 『청구도』를 그리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다.
청구도범례에서도 각 고을에 지도를 나누어준 다음 교정하도록 하는 과정을 설명한 부분에 지도식이 나온다.
지도식은 사방을 12개의 방위로 나누고, 10리 간격의 원을 그려 위치를 바로잡아 나가도록 하는 방식이다.
본 지도책은 하천의 유로, 지명, 해안선, 섬 등의 내용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본 사이트의 『조선지도』와 『팔도군현지도』계통과 상관 관계가 높다.
이 계통의 지도는 현재 규장각 이외에도 7개 정도의 지도책이 더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본 지도책은 그 중에서도 국립중앙도서관의 『해동여지도』의 것과 거의 동일하다.
다만 앞의 지도책이 군현별로 다르게 그린 반면에 본 지도책은 모두 연결해서 그렸다는 점이 다르다.
모든 군현을 연결해서 그렸다는 점에서는 大阪府立圖書館 소장의 『조선도』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조선도』는 범례의 사용이라는 측면에서 『해동여지도』와 거의 동일하게 되어 있는 반면에 본 지도책은 군현과 진보에서 완전히 다른 기호와 형식을 사용하고 있다.
다만 본 지도책이 앞의 7개 지도책과 내용적으로 완전히 동일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직접적인 필사관계에 있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최한기가 작성한 ‘청구도제’뿐만 아니라 김정호의 ‘청구도범례’에는 기존 지도의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는데, 방안의 크기가 다르고 지도 위에도 그려져 있다는 내용이 나오고 있다.
이런 내용에 가장 부합되는 것은 위의 7개 지도책 중에서 『해동여지도』이다. 『조선지도』와 『팔도군현지도』가 1770년 이전의, 『해동여지도』는 장진부의 설치(1787년) 이전의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반면에 『조선도』는 장진부가 설치되었다는 사실은 반영되어 있지만 읍치의 위치나 경계선 등이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
본 지도책에는 후주부(1823년)가 설치된 이후까지의 내용이 반영되어 있어 앞의 지도책들을 그대로 편집한 것이 아니라 시기적 변화 양상을 담아내려 노력하면서 편집한 것이다. (이기봉)

 

 

이 지역은 《청구요람》(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乾冊 21層 12版에 있는 장수현, 임실현, 안의현, 진안현, 남원부 지역이다.
현 행정구역상 전라북도 진안군, 장수군, 임실군, 남원시, 경상남도 함양군 일부에 걸쳐져 있다. 이 지역은 노령산맥과 소맥산맥이 지나는 곳이다.
크게 수계도 금강유역권과 섬진강 유역권으로 분리된다.
장수현은 현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 천천면, 계남면, 장계면, 계북면 일대로, 읍치는 장수읍 장수리에 있었다.
지도의 하천은 금강의 지류들이다. 장수현은 원래 백제의 雨坪縣인데 고려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현 우측, 경상도 안음현과의 경계로 표시된 六十峙는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간 요해처로서 이후 도적이 많아 행인 60명이 모여야만 안전하게 넘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지도에는 교통과 관련된 지명인 院이 보이는데, 이는 여행자의 숙식을 제공하고 편의를 제공하는 시설이다.
남원부 경계변에 있는 分水院, 신서면에 있는 松灘院 등이 그것이다.
읍치 북쪽에 있는 滄溪書院은 세종 때 유명한 정승이며 본관이 장수인 황희와 그 아들 황수신, 기타 유호인, 장응두 등을 배향하고 황희의 영정을 안치한 서원이다.
진안현은 원래 백제의 難珍阿縣, 月良으로 신라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진안현은 서쪽 전주부로부터 熊峙(곰치재)등의 험한 고개를 오른 후부터 평탄해지는 고원형 지형이고, 남서쪽으로는 섬진강, 동북쪽으로는 금강상류 진안천이 馬耳山을 중심으로 갈라지며 두 지역으로 구분 되고 있다.
진안현은 현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읍, 상전면, 부귀면, 마령면, 성수면, 백운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진안읍 군상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 아래쪽에 있는 마이산은 湧出峯이라 하기도 하는데, 태종이 남행할 때 그 모양이 말의 귀와 같다하여 마이산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또 신라에서는 西多山이라 부르며 小祀를 거행했다. 남원부는 원래 백제의 고룡군이었다. 남원부에 흐르는 하천은 섬진강의 지류인 蓼川이다.
요천 한가운데는 바위가 있는데, 그 모양이 소와 같아 牛巖이라 한다.
남원부는 현 남원시 운봉읍, 산내면, 동면 아영면을 제외한 남원시 전 지역과 장수군의 반암면, 산서면 일대, 임실군의 삼께면, 지사면과 오수면 남쪽부분,
구례군의 산동과 광의면, 용방면 북쪽부분 그리고 곡성군의 고달면을 포함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坤冊 22層 13版에 있는데 남원시 동충동 일대에 있었다. (민경이)

 

 개치(介峙)

검덕산(儉德山)

계창(溪倉)

고거영현(古居寧縣)

고원산(高遠山)

고택(高澤)

국천(菊川)

금당치(金堂峙)

기치(箕峙)

나치(羅峙)

노현(盧峴)

농암(籠巖)

뇌계(?溪)

뉴치(流峙)

답암면(踏巖面)

대방치(大方峙)

덕유산(德裕山)

동천(東川)

두모면(豆毛面)

마령면(馬靈面)

마이산(馬耳山)

만향사(滿香寺)

멸치(滅峙)

명저치(鳴猪峙)

묵산(墨山)

미방산(美方山)

백운산(白雲山)

백운산(白雲山)

백전면(柏田面)

백화산(白華山)

병곡면(甁谷面)

본월치(本月峙)

봉황사(鳳凰寺)

부귀산(富貴山)

부전현(扶田峴)

북창(北倉)

북창(北倉)

북하면(北下面)

분수원(分水院)

불영봉(佛影峯)

사치(沙峙)

산영치(山影峙)

상신북면(上身北面)

색천(索川)

서상면(西上面)

서원(書院)

서창(西倉)

서창(西倉)

서하동면(西下洞面)

성수산(聖壽山)

소비치(所非峙)

송탄원(松灘院)

신남면(身南面)

신북면(身北面)

신북창(新北倉)

신북창(新北倉)

신서면(身西面)

신서면(身西面)

영은사(靈隱寺)

영취사(靈鷲寺)

옥산창(玉山倉)

와동면(瓦洞面)

용암치(龍巖峙)

우평(雨坪)

육십치(六十峙)

율치(栗峙)

이동면(二東面)

일동면(一東面)

임남면(任南面)

임현내면(任縣內面)

장수(長水)

장안산(長安山)

적리면(迪里面)

죽본치(竹本峙)

중대산(中臺山)

중산(中山)

중치(中峙)

지사면(只沙面)

진안(鎭安)

진전면(眞田面)

진현면(晉賢面)

진현산(晉賢山)

창계서원(滄溪書院)

천방산(天方山)

청심정(淸心亭)

추치(楸峙)

축치(杻峙)

침치(砧峙)

탄전면(呑田面)

향적봉(香積峯)

흥면(興面)

 

 

이 지역은 《청구요람》(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乾冊 21層 13版에 있는 전주부, 임실현, 진안현, 남원부, 순창군 지역이다.
현 행정구역상 전라북도 전주시, 완주군, 임실군, 순창군, 남원시, 진안군 일대에 걸쳐져 있다.
이 지역은 크게 만경강 유역과 섬진강 유역으로 분리할 수 있다.
전주부는 만경강의 지류인 전주천이 흐른다. 원래 백제의 完山이며, 比斯伐, 比自火라고도 한다.
조선 태종 원년에 임금의 고향으로 完山留守府로 승격시켰고 1403년(태종 3)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전주부는 현 전라북도 전주시와 완주군의 봉동읍, 삼례읍, 이서면, 구이면, 상관면, 소양면 그리고 익산시 시내와 오산면을 포괄하는 큰 고을이다.
읍치는 전주시 중동, 경원동, 풍남동 일대에 있었다.
전주부는 전라도 관찰사가 주재하던 監營이 설치되었던 곳으로 동학 농민전쟁 때 격전지로서 잘 알려져 있다.
읍치 우측에 있는 慶基殿은 조선왕조가 들어선 후 태조 이성계의 본향이라하여 이성계의 御容을 奉安한 곳으로 이전에는 眞殿이라 하였다.
경기전 북쪽에는 이성계 始祖의 위판을 봉안하고 있는 肇慶廟가 있다. 임실현은 원래 백제의 任實郡이다.
임실현은 현 임실군 임실읍, 성수면, 관촌면, 신덕면, 신평면, 운암면, 강진면, 덕치면, 청웅면, 오수면 북쪽에 해당하며, 읍치는 임실읍 성가리 일대에 있었고 진산은 북쪽의 龍繞山이다.
섬진강 줄기가 진안현으로 들어와 읍치에서 조원천, 둔남천 등 지류로 갈라져 순창군 방향으로 나간다. 강진면 부근에 古九皐縣은 본래 백제의 ?坪縣으로 신라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민경이)
 

갈담역(葛覃驛)

갈천(葛川)

감영(監營)

강진면(江津面)

건북산(乾北山)

경기전(慶基殿)

고구부현(古九阜縣)

고덕산(高德山)

고절면(高節面)

구성연(九星淵)

구이동면(仇耳洞面)

구진참(龜進站)

궁천(穹川)

금당치(金塘峙)

남고산성(南固山城)

남면(南面)

노령(蘆岺)

대곡(大谷)

대원사(大院寺)

대치(大峙)

덕치면(德峙面)

덕현면(德峴面)

독자산(獨子山)

두만산(斗滿山)

마치(馬峙)

만마동(萬馬洞)

말천면(末川面)

무량산(無量山)

반룡산(盤龍山)

백암원(白巖院)

백연산(白蓮山)

백운산(白雲山)

부남면(府南面)

부동면(府東面)

북창(北倉)

사현(沙峴)

삼계(三溪)

삼북면(三北面)

상관면(上官面)

상동면(上東面)

상북면(上北面)

상운면(上雲面)

서면(西面)

서창(西倉)

서천(西川)

석현면(石峴面)

소치(掃峙)

수락사(水落寺)

순우평(?隅坪)

순천(?川)

신덕면(新德面)

신안(新安)

신평면(新坪面)

신흥사(新興寺)

오수역(鼇樹驛)

오원역(烏原驛)

오지면(吾枝面)

옥전면(玉田面)

외창(外倉)

용요산(龍繞山)

웅치(熊峙)

원통산(元通山)

유점치(鍮岾峙)

이산(?山)

이서면(二西面)

이암면(耳巖面)

이인면(里仁面)

익산(翼山)

익파산(翼波山)

임실(任實)

적천치(賊川峙)

전주(全州)

정각산(正覺山)

조경묘(肇慶廟)

하동면(下東面)

하동면(河東面)

하북면(下北面)

하운면(下雲面)

 

 

이 지역은 《청구요람》(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乾冊 21層 14版에 있는 김제군, 금구현, 태인현, 정읍현, 순창군, 전주부 지역이다.
현 행정구역상 전라북도 정읍시, 김제시에 걸쳐져 있다. 이 지역은 동진강 유역권으로 그 지류가 흐르고 서해로 나간다.
김제군은 원래 백제의 壁骨郡인데 신라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현재 전라북도 김제시 시내, 죽산면, 부량면, 백산면, 용지면, 백구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교통, 옥산동, 요촌동 일대에 있었다.
김제군은 하천 사이로 나지막한 산들이 있는 평평한 지형으로 이루어졌다.
태인현 경계변에 있는 碧骨堤는 그 주위가 60리가 되며, 『三國史記』에 330년(訖解王 21)에 처음 만들어졌다고 전한다.
벽골제는 사적 11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금구현은 본래 백제 仇知只山縣이었는데 신라 때 지금이름으로 고쳤다.
금구현은 현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황산면, 봉남면, 금산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김제시 금구면 금구리 일대에 있었다.
진산은 아래에 있는 鳳頭山이다. 전주부 경계변에 있는 母岳山에는 龍池가 있어 하늘이 가물어 비를 빌면 응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메워진 상태이다.
태인현은 백제의 大尸山郡인 太山郡과 백제의 賓屈縣인 仁義縣을 합쳐져 만든 고을이다. 지도에도 옛 태산군과 인의현의 지명이 그대로 남아 있다.
태인현은 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신태인읍, 감곡면, 산내면, 산외면, 옹동면, 칠보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정읍시 태인면 태성리에 있었고, 북쪽에 있는 竹峙가 진산이다.
동진강 강변에 있는 武城書院은 1696년(숙종 22)에 사액받았고, 통일신라 때 이곳 태산군의 태수로 부임했던 최치원을 배향하였다.
1864년 흥선대원군에 의한 서원철폐령 속에서도 살아 남은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지금은 사적 166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남촌면에 있는 南皐書院은 1577년(선조 10)에 건축되어 1685년(숙종 11)에 사액받았고, 李項을 배향하였다. (민경이)
 

갈치(葛峙)

감산면(甘山面)

개야산(蓋也山)

개토면(介吐面)

거산면(居山面)

고이성현(古伊城縣)

고태산현(古太山縣)

고현내면(古縣內面)

구지산(仇知山)

굴치(屈峙)

귀신사(歸信寺)

귀전면(歸田面)

금구(金溝)

금산사(金山寺)

김제(金堤)

남고서원(南皐書院)

남면(南面)

남일면(南一面)

남천(南川)

남촌면(南村面)

내장산(內藏山)

내재역(內才驛)

내재역(內才驛)

대정면(大井面)

대제(大堤)

대천(大川)

덕성산(德星山)

동면(東面)

동촌면(東村面)

모건산(冒巾山)

모악산(母岳山)

모촌면(母村面)

무성서원(武城書院)

묵방산(墨方山)

반산면(半山面)

백석면(白石面)

백여치(白如峙)

벌촌면(伐村面)

벽골제(碧骨堤)

봉산(鳳山)

부상면(扶桑面)

부서면(府西面)

북면(北面)

북촌면(北村面)

사곡면(沙谷面)

사창(社倉)

산내면(山內面)

산성봉(山城峰)

산외면(山外面)

상남면(上南面)

상두산(象頭山)

상치등면(上置等面)

새장치(塞墻峙)

서고면(西高面)

서원(書院)

서원(書院)

서촌면(西村面)

수금면(水金面)

수류면(收流面)

수정면(遂政面)

승가산(僧伽山)

시천(?川)

신광사(神光寺)

안천(安川)

안혁치(安革峙)

앵곡면(?谷面)

엄광산(嚴光山)

역(驛)

역(驛)

역양면(?陽面)

염암대(鹽巖坮)

영은사(靈隱寺)

옹지면(瓮池面)

완산(完山)

완전면(?田面)

우휴면(雨?面)

운암산(雲巖山)

운주산(雲住山)

원평동(院坪洞)

월산면(月山面)

유상대(流觴臺)

율치(栗峙)

은기면(銀器面)

이남면(伊南面)

이동면(伊東面)

이북면(二北面)

이서면(伊西面)

이평(梨坪)

인의(仁義)

인의면(仁義面)

일북면(一北面)

입천면(立川面)

장수면(長水面)

정시(鼎時)

정읍(井邑)

정촌(井村)

정토산(淨土山)

조라지면(助羅之面)

종산치(終山峙)

종정천(從政川)

죽치(竹峙)

중영(中營)

진교(津橋)

철마산(鐵馬山)

초경면(草慶面)

초산(楚山)

칠보산(七寶山)

탄치(炭峙)

태산(太山)

태인(泰仁)

하남면(下南面)

하서면(下西面)

홍동천(洪洞川)

화음교(禾音橋)

회문산(回文山)

흥복사(興福寺)

흥천면(興天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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