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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향 임실/임실군 자료

[스크랩] 소충사 유래및 소개,사진

by 임실사랑 2008. 12. 20.

 

소충사(昭忠祠)와 이석용(李錫庸)의 병장

소충사는 구한말 정재 이석용을 주벽으로 그의 휘하에서 활동하던 의병 28의사를 배향하고 있는 사우이다."소충사"라는 액판글씨는 대통령 이승만이 쓴 것이다.

그리고 조의단(弔義壇)과 28의사 기념비문도 대통령 이승만이 쓴 것이다.

이석용 의병장은 1878년 11월 29일 성수면 삼봉리에서 전주있의 삼대독자로 출생,1905년 일본이 고종황제를 위협하여 을사 5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1906년 미국공사에 서한을 보내 일본의 간계와 조선의 어려운 실정을 호소하였다.1907년 다시 일본이 고종을 위협 순종을 강제로 양위하자 호남의병창의 동맹을 결성 의병장에 추대된다.12차례의 대소전투에서 많은 왜병대장과 수하들 그리고 시설들을 파괴하는 혁혁한 공을 세웠으나 신식무기로 무장한 왜군의 공격을 당하지 못하고 의병들의 희생을 막으려 의병을 해산하였다.

1911년 3월에는 옛동지들을 규합하여 일본에 잠입,천왕암살을 기도하였으나 미수에 그쳤다.1212년 다시 비밀결사대를 조직하여 중국으로 망명하여 항일운동을 계속하려 하였으나 1913년 동지의 배신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1914년 전주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그해 4월 4일 대구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37세).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정재 이석용 의병장의 생애와 의병활동

1.출생과 성장

이석용(李錫庸)은 字가 경항(敬恒)이며, 호가 정재(靜齊)이고, 본관은 전주(全州)이다.아버지는 화산(華山) 봉선(鳳善)이며,어머니는 조양임씨(兆陽林氏)이다.그는 1878년(고종 15년) 음력 11월 29일 지금의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 죽전마을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1895년(고종 32년) 8월 왜적들이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한 다음 조선의 조정을 친일내각으로 구성하여 국권(國權)을 탈취하고자 혈안이 되었으며,내각에 의하여 단발령까지 내리니 이를 지켜본 그는 비분(悲憤)을 이기지 못하였다.그리하여 그는 세정(世情)을 살피고 더 노픙 학식을 넓혀 구국의 방책을 넓히기 위해 당대의 석학(碩學)이자 志士로 이름있는 연재 송병선(淵齎 宋秉璿),심석 송병순(心石 宋秉珣),입재 송근수(立齋 宋近洙),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간재 전우(艮齋 田愚),운람 정봉헌(雲藍 鄭鳳鉉),최계남(崔溪南),허남려(許南藜),애산 정재규(艾山 鄭載圭),면우곽종석(勉宇 郭鍾錫),면암 최익현(勉庵 崔益鉉)등을 두루 찾아 학문을 논하고 또한 구국이념에 공감하였다.

1905년(광무 9년) 왜적은 고종황제를 위협하고 몇몇 친일대신들을 앞잡이로 하여 소위 을사5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실질적으로는 일본의 지배를 받게했다.이소식이 전국에 전해지자 당시의 우국지사들은 서울로 올라가 대한문앞 광장에 모여 5조약의 체결을 무효화 할 것을 호소하였다.그도 이때 여기에 참석하여 다른 우국지사들과 뜻을 함께 하였다.그러나 대세가 이미 기울어진 형편에 어떠한 묘책도 없었으니 오직 의병을 일으키는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때마침 연암 최익현이 거의(擧義)하려고 정읍군 태인면 종성리의 임병찬 처소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면암 최익현 선생을 찾아 기의(起義)할 것을 약속하고 호남에서 맨먼저 자발적으로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이 되었다.

2.의병 창의(義兵倡義) 배경과 의병활동

가.창의 배경

이석용은 고향인 임실지방을 본거지로 의병을 모집하여 일본군과 싸울 준비를 하였다.이때 나이 29세의 청년이었다.그는 상이암을 비롯하여 전주,임실,장수,진안,남원,순차으곡성,함양등지를 두루 다니면서 동지를 규합하였다.한편 당시의 정부를 비롯하여 일본정부 앞으로 규탄문을 발송하고 전국의 동포에게 민족의 주권을 되찾자는 격문,건의분,호소문 등을 발송하였다.광무 11년(1907년)일본과 친일 대신들은 고종을 위협하여 왕위를 순종황제에게 물려주게 하였다.순종이 왕위에 오르자 우리나라의 주권은 뿌리채 일본의 손아귀에 들 게 되었고 순종은 허수아비같은 자리만 지켜야 했다.즉 친일파 대신들과 침략자 왜인의 각본에 따라 이해 7월 정미 7조약을 체결하고 왜인들로 하여금 조선정부 요직의 고문을 맡게 하는등 모든 정책결정에 관여하였다.이에 의분을 참지 못한 정재 이석용은 의병기의(起義)를 서둘렀다.

이해 8월 26일 아버지 앞에 하직인사와, 이튿날 28일 선영에 고별제를 지내고, 9월 1일 종친들에게 하직인사를 올렸다.9월 2일 그는 조직된 참모들을 불러 의논하고 의병대의 이름을 "호남의병창의동맹단(湖南義兵倡義同盟團)"이라 하였다.9월 4일 운현(雲峴:지금의 대운재)의 절정(絶頂)에 처음 진을 치고 석전리에서 의병을 모집하였는데 그 수가 20 여명에 달하였다.

9월 5일부터 진안과 장수,임실의 주요지역을 돌며 의병모집과 함께 왜적을 향하여 기습을 하니 왜적들이 모조리 전주쪽으로 도망하였다.

나.창의동맹단과 의병활동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곳 저곳으로 진을 옮겨가면서 의병활동을 진행하는 가운데 사방 열읍(列邑)에 격문을 띄우고, 마침내 9월 12일 마이산(馬耳山)에서 의병거사 궐기대회를 개최 하였다.그동안 모집하였던 모든 의병들은 마이산 남쪽 용바위(龍岩)에 모이게 하고, 나무를 벌채하여 단(壇)을 쌓은뒤 "호남의병창의동맹단(湖南義兵倡義同盟團)"이라 크게 써서 깃발을 걸 게 하였다. 제단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는 각각 기치(旗幟)를 세우게 하고, 기폭(旗幅)에는 "정기가(精氣歌), 단심가(丹心歌)는 문천상(文天祥)이 순절한 시시(柴市)와 정몽주(鄭夢周)가 절사(絶死)한 선죽교(善竹橋)와 함께 비춰 충렬(忠烈)의 소거를 같이하네. (竹橋柴市烈同聲)" 라고 써 꽂아 놓았다.이 자리에 모인 의병들에게는 의병창의(義兵倡義)라 수건에 써 머리에 동여매게 하였다.이때 모인 의병은 모두 500 여명에 달하였으며, 부근의 부모형제와 장정들이 모여 주위 산봉우리에서 파수를 보았으니, 이날의 거사를 성원하기위해 민중들의 수까지 합치면 천여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의병통솔조직은 다음과 같다

의병장(義兵將)

이석용(李錫庸)

선봉(先鋒)

박만화(朴萬華)

최덕일(崔德逸)

송판구(宋判九)

중군(中軍)

여주목(呂注穆)

김운서(金雲瑞)

김성학(金成學)

후군(後軍)

김사범(金士範)

윤명선(尹明善)

전성학(全成鶴)

참모(參謨)

전해산(全海山)

한사국(韓士國)

이광삼(李光三)

총지휘(總指麾)

박갑쇠(朴甲劍)

곽자의(郭子儀)

임종문(林宗文)

연락(連絡)

홍윤무(洪尹武)

박성무(朴成武)

윤병준(尹秉俊)

도로부장(道路副將)

김사원(金士元)

김공실(金公實)

김성율(金成慄)

보급(補給)

한규정(韓圭井)

박금동(朴金東)

박문국(朴文局)

운랭(運糧)

오기열(吳琪烈)

조영국(趙榮國)

김학문(金學文)

기실(記室)

전해산(全海山)

한사국(韓士國)

 

궐기대회가 모두 끝나고 9월 13일 그는 의병을 거느리고 진안 마령을 거쳐 진안읍 앞산에 있는 우화정(羽化亭)에 본진(本陳)을 치고 집중포화를 쏘아대니 왜군은 옷도 입지 못한채 전주로 도망쳤다.그 후 14일부터 가치(歌峙)에 당도하여 용담(龍潭) 심원사(深源寺)에 주둔하다가 진을 숭암사(崇巖寺)에 옮겼다. 선봉장이자 포장(砲將)인 박만화(朴萬華)가 적에게 접근하여 왜병 두명을 사살하고 적의 흉탄에 맞아 그 자리에서 전사하였다.이때 나이어린 의병 박철규(朴哲圭)와 허천석(許天錫)도 아깝게 전사하였다. 27일 운현(雲峴)에 이르니 원근(遠近)의 부하들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 모두 모였다.

12월 7일부터 전주,상관,9일 회침리,11일 남원 산실(山室),13일 목동,14일 순창 동심리(同心里),15일 밤부터 학산,17일까지 월면리를 들러 옛부하를 만나고, 잿말을 거쳐, 18일에는 백련산의 이윤리에 들어가 대장간을 설치하고 무기를 개조하며 수리하였다.

1908년(융희2년) 1월 19일 지사 옥산,성수 계월,20일은 도봉에서 흩어졌던 의병을 규합하고, 2월 1일 학산에 군사를 이끌고 4일에는 둔덕방에 들러 왜놈집에 불을 지르고 가짜의병 한 명을 총살하였다.12일 운봉 황산에,13일 밤 인월 장터를 지나 함양땅으로 들어갔다.3월 18일 梨芳里에서 의병 3명이 전사하였으니 그는 "하늘이 어찌 이에 이르게 하는가"하고 탄식했다.

3월 21일 아침 비가오는데 운현(雲峴)에서 왜적의 습격을 받아 의병들 다수가 전사하고, 이때 김 중군이 총을 들고 연발을 쏘며 군사를 거느리고 퇴각하였다. 3월 22일 격전지인 운현(雲峴)에 나아가 확인한 결과 따르는 군사는 겨우 16명,전사자가 16명이며 포로로 잡힌 의병이 2명,부상자가 3명이었다.그때에 최 포장이 총탄에 맞으면서도 적에게 총 두발을 쏘아대고 꾸짖으며 말하기를 "왜놈의 손에 죽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죽는다" 한 후 칼을 빼어 목과 배를 찌르고 눈을 부릅뜨며 장렬히 전사하였다.

3월 27일 관촌역에서 김 중군이 왜적 한명을 죽이고 지화(紙貨)를 빼앗았으며 문경달(文景達)이 상관(上關)에서 왜적을 쫓아 그 복장을 빼앗았다.또 전화통을 부수고 왕방리(枉芳里)에 들어가 왜놈에게 붙어 활동하는 자를 인근 마을에 불러내어 조리돌림을 하고 총살하였다.

4월 28일 이석용 의병장은 운현(雲峴)의 패전한 곳에 가시덤불을 베어내어 3尺壇을 만들고 조사단(弔死壇)이라 이름지은후 돼지 한 마리를 제물로 차려 戰亡 壯士 28義士들의 合祭를 지냈다.그날 저녁 밤은 칠흙과 같이 어둡고 소낙비에 번개가 치니 마치 신의 영험이 있음인가? 그는 통곡하며 생각하였다

28 神位 義士

龍潭戰亡義將   박만화(朴萬華)

義童   박철규(朴哲圭)

義童   허천석(許天錫)

淳昌戰亡義將   최일권(崔一權)

斗峰戰亡義將   이광삼(李光三)

南元戰亡義將   김사범(金士範)

義卒   서상열(徐相烈)

長水戰亡義將  허윤조(許允照)

義卒   성경삼(成景三)

義卒   양경삼(楊景三)

崒里被禍義卒   오병선(吳秉善)

雲峴戰亡義將   최덕일(崔德逸)

義將   여주목(呂柱穆)

義士   한사국(韓士國)

義卒   윤정오(尹正五)

義卒   한득주(韓得周)

義卒   김춘화(金春華)

義卒   정군삼(鄭君三)

義卒   박운서(朴雲瑞)

義卒   김치삼(金致三)

義卒   박인완(朴仁完)

義卒   김여집(金汝集)

義卒   서성일(徐聖一)

義卒   박달천(朴達天)

義童   김동관(金東觀)

義童   김학도(金學道)

義僧   봉수(鳳洙)

義僧   덕홍(德弘)

 

 

3.임자동밀맹단과 의병장의 최후

1909년 3월 6일 자기휘하 의병들을 일단 해산하여 귀가하도록 하였다.1911년 3월 그는 옛 동지들을 모아 비밀조직을 하였다.그의 비밀조직은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일본천황을 암살할 게획을 세웠다.그러나 이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 그는 1912년(壬子年) 겨울 다시 비밀 결사대를 조직하여 중국으로 건너가 활동할 것을 결의하였다.이 비밀결사대를 "임자동밀맹단(壬子冬密盟團)"이라 하였다.

이때 조직된 비밀 결사대 명단은

단장

이 석용(李錫庸)

단원

구례

정찬석(鄭贊錫)

 

 

 

하동

최제학(崔濟學)

이규진(李圭鎭)

 

 

전주

최병심(崔秉心)

 

 

 

임실

김병주(金炳周)

최창열(崔滄烈)

 

 

진안

정진희(鄭鎭喜)

최자운(崔子雲)

이경하(李景夏)

 

곡성

안자정(安子精)

안영오(安潁五)

유인수(柳寅秀)

조영선(趙泳善)

조우식(趙愚植)

 

 

남원

김경호(金景浩)

조성민(趙成珉)

김인식(金仁植)

김학수(金學洙)

허간(許幹)

허주(許柱)

허업(許業)

정재 이석용 의병장은 많은 역경속에서 오직 구국의 정신으로 많은 동지들을 규합하여 활동하다가 1912년 10월 13일 일본경찰에 체포되고 말앗다.이때가 그의 나이 35세였다.의병장은 체포된후 임실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앗고 1914년 1월 12일 전주 법원에서 재판을 받은후 그해 4월 4일 정오 호남의병장 이석용은 조국광복의 대망을 이루지 못한채 대구형무소에서 絞首形을 받고 殉國하였다

4.소충사(昭忠祠) 건립과정

구(舊) 소충사는 성수면 양지리 학당마을에 1957년 7월부터 428평의 부지를 확보하여 사당 1동(8평)과 강당 1동(8.5평)을 조성하기 시작, 약 3년간 사업으로 완공을 보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조의단(弔義壇)"이라는 휘호를 받아 의병대장 정재 이석용의병장과 28의사의 위패를 봉행하였으며 순절한 날이 각기 달라 매년 음력 7월 7일 七夕날 면민 모두가 참여하여 합동으로 제례를 거행하였다.

소충사 성역화 사업 계획에 따라 93년도에 2억 1천4백만원의 예산을 들여 성수면 오봉리에 부지 2만평을 확보하고 94년부터 2000년까지 16억 4천만원을 들여 시설을 완료하였다.

그후 2002년 8월 15일부터 성수면 양지리 구 소충사 사당에서 현 소충사로 위패를 모셨다.

묘지는 의병당시 격전지였던 운현(雲峴)의 지주골(蜘蛛谷)과 오봉리 큰 저수지 아래 골짜기에 모셔져 있었으나 많은 지인(知人)들의 발의로 면민들의 의견을 모아 면 자체사업과 군의 지원을 받아 월평리 신촌마을 산 1번지에 운현(雲峴)에 계신 17위(位)와 오봉리에 계신 11위(位)를 합하여 1988년 5월 18일 28위(位)를 함께 모셨다.

현 소충사 건립 추진중 1995년 (乙亥) 11월 19일 (巳時) 청명한 날씨에 월평리 신촌마을 앞에 간좌곤향(艮座坤向)으로 게신 28의사들의 묘를 파묘하고 정재 이석용 의병장은 전라남도 영암군 월출산(月出山) 아래 가지동(可之洞)에서 모셔와 군부대의 협조를 받아 장병 10 여명이 엄숙한 자세로 현 소충사 묘터에 운구하고 11월 20일 오후 2시에 의병장과 배위(配位)를 합장하여 먼저 하관을 하였으며,

묘역을 만드는 과정에 28의사는 10위씩 3열로 배열하여 안장하고 묘지를 조성하였으며 오후 4시 30분에 제사를 마쳐 이장을 완료 하였다.

소충사 성역화 사업 현황

위치: 임실군 성수면 오봉리 산 130-1 일원

부지면적: 20,300 평

주요시설: 분묘 2기,사당 20평, 기념관 43평,관리사 20평,대문,담장,화장실,상하수도시설,조경,기타

*사당,기념관은 4억 4천 9백만원으로 96년 10월 착공,98년 11월에 완공하였음

기념관 내부 전시시설(유물,유품,영상물)은 2002년 6월 완료

총사업비: 2,265백만원

사업기간: 1992~2002.11월

건립목적:이석용 의병장외 28의사의 항일 투쟁과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순절하신 충의열사의 호국정신 계승,임실출신의 독립유공자 묘역과 유물을 한데 모셔 독립운동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함

 

첨부파일: 호남창의록

출처 : 임실을 사랑하는 사람들
글쓴이 : 바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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