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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향 임실/임실군 자료

[스크랩] 임실군 유무형 문화재

by 임실사랑 2008. 12. 20.

임실군 유무형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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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군 관곡서원 소장 전적 및 고문서(館谷書院 所藏 典籍 및 古文書)

지정별 : 도지정유형문화재 제198호
시대 : 조선시대
지정일 : 2003.05.16
규모 : 2권 10매
위치 : 전북 임실군 지사면 관기리 208번지
정보제공 : 임실군 문화관광과 063-640-2641
 

 

서원 관계 서적이나 문서들이 희귀한 편인데 관곡서원에 관계되는 일괄 문서를 두루 구비하고 있어 매우 귀중한 자료하고 판단되며 保奴案, 保直案은 院奴와 서원의 직숙을 담당하던 院直을 재정적으로 돕기위해 배정된 保인 保奴, 保直의 명단으로서 19세기에 서원에도 保가 배정되었음을 알려준다.


古文書 중에는첫째, 서원 接人의 잡역을 금해줄 것을 진정하여 수령으로부터 승인받는 과정을 알 수 있게 하는 것. 둘째, 서원 儒案에 평민이 入錄되고 있으며 유생의 확보가 재정적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셋째, 서원 유생을 수령이 差定하고 그 差帖도 수령이 발행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있어 18-19세기 사회를 이해하는 데에 좋은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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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군 만취정(晩翠亭)

지정별 : 도지정유형문화재 제106호
지정일 : 1983.08.24
위치 : 전북 임실군 삼계면 산수리 234
정보제공 : 임실군 문화관광과 063-640-2641
 
 
소개
 만취정은 김위(金偉, 1532∼1595)가 조선 선조 5년(1572)에 세운 건물로 순조 14년(1814)에 고친 것이다. 김위는 지방관으로 재직할 때마다 선정(善政)을 베푼 사람으로 유명하며, 경상도 합천 등지에 그의 업적을 기리는 선정비(善政碑)가 남아 있다. 만취란 겨울에도 변하지 않는 초목(草木)의 푸른빛이라는 뜻으로 김위의 인품을 상징하는 듯하다.


만취라는 정자의 이름은 선조 13년(1580)에 우리 나라를 찾은 명나라 사람 서계신(徐繼申)이 지어 주었고, 글씨는 선조의 친필이라는 얘기가 전한다. 정철(鄭澈), 기대승(奇大升), 임제(林悌) 등 대학자들과 김위가 술잔을 기울이며 주고받던 시가 담긴 상호헌시판(相互獻詩板)이 정자 내에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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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군 삼계강사 계안(三溪講舍 契案)

지정별 : 도지정유형문화재 제160호
시대 : 조선시대
지정일 : 1998.01.09
위치 : 전북 임실군 오수면 둔덕리 584
정보제공 : 임실군 문화관광과 063-640-2641
 
소개
 이 문서는 삼계 강사계의 운영에 관한 사항을 담은 것으로, 조선시대 향촌사회의 모습과 함께 혼례(婚禮), 상례(喪禮), 관례(冠禮) 등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삼계강사는 세종대왕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의 증손 이담손(李聃孫)이 유림들과 함께, 주민들을 교화시키고 학생들을 교육시키기 위하여, 광해군 10년(1618)에 건립한 서재(書齋)다.


일제 강점기 때에는 삼계강사가 중심이 되어 주민들에게 민족자강과 독립의식을 고취시켰으며, 강사재산을 헌납하여 오수초등학교를 건립하는데 그 초석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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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군 상이암 부도(上耳庵 浮屠)

지정별 : 도지정유형문화재 제150호
지정일 : 1995.06.20
위치 : 전북 임실군 성수면 성수리 산 85
정보제공 : 임실군 문화관광과 063-640-2641
 
소개
 이 부도는 스님들의 사리를 봉안한 것이다. 조선 중기에 만든 것으로 보이며, 몸체나 덮개돌 위에 얹은 노반(露盤), 노발(露鉢) 보개(寶蓋) 등에서 형식과 구조, 조각(彫刻) 수법이 매우 뛰어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상이암은 통일신라 헌강왕 1년(875)에 도선(道詵) 스님이 지었으며, 처음에는 도선암(道詵庵)이라 하였다. 그러나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이곳에 와서 불공을 드릴 때, 나중에 왕이 될 것이라는 소리를 들은 이 후에 상이암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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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군 수운정(睡雲亭)

지정별 : 도지정유형문화재 제151호
지정일 : 1995.06.20
위치 : 전북 임실군 신덕면 금정리 251-1
정보제공 : 임실군 문화관광과 063-640-2641
 
 수운정은 조선 철종 13년(1862)에 이 마을에 살던 김낙현(金樂顯)이 지은 것으로, 수운은 김낙현의 호이다. 두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난 후 깊은 슬픔에 빠져 있던 김낙현은 이 정자에서 아들 잃은 슬픔을 달래고 자연에 파묻혀 살았다고 한다. 정자 주변으로 펼쳐진 맑은 물과 푸른 산과 들은 한 폭의 수채화를 떠올리게 한다.


일찍이 이 곳을 찾은 시인 묵객들 중에 이 곳의 아름다움을 극찬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며, 그들이 남긴 글이 현판으로 남아 있다. 한국전쟁 때 마을이 온통 불에 탔지만 수운정은 피해를 전혀 입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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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군 신흥사 대웅전(新興寺 大雄殿)

지정별 : 도지정유형문화재 제112호
지정일 : 1985.08.16
위치 : 전북 임실군 관촌면 상월리 360
정보제공 : 임실군 문화관광과 063-640-2641
 
소개
 이 대웅전은 석가모니와 그 분의 협시보살로 문수와 보현 두 보살을 모신 신흥사의 본전(本殿)이다. 기단부분과 초석은 모두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한 것이며, 지붕은 기둥의 높이가 낮아 상대적으로 커 보인다. 기둥은 이 절을 처음 지었을 때의 것이라는 얘기가 전한다.

신흥사는 백제 성왕 7년(529)에 지었으며, 처음 지었을 때에는 300 여 명의 스님이 수도(修道)하는 큰 규모의 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이 대웅전과 산신각(山神閣)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대웅전은 여러 차례 보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지었을 때의 모습을 지니고 있어, 백제시대의 사찰 건축양식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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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군 오수리 석불(獒樹里 石佛)

지정별 : 도지정유형문화재 제86호
지정일 : 1979.12.27
위치 : 전북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 550
정보제공 : 임실군 문화관광과 063-640-2641
 
소개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거대한 불상은, 팽이 같은 머리와 얼굴의 이목구비에서 다소 형식화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받침돌을 제외하고는 하나의 돌에 불상의 모든 것을 표현한, 매우 수준 높은 작품이다. 부처의 광명을 상징하는 머리 뒤의 장식인 광배(光背)에 새긴 연꽃과 불꽃무늬가 무척이나 화려하다.

어느 날 산에서 내려오는 큰 바위덩어리를 본 아낙네가 놀라 소리를 지르자 바위는 그 자리에 멈춰 이 불상이 되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 불상을 수호신으로 여겨 불공도 드리고 움막도 지어 정성껏 모신다. 석불이 마을 앞까지 이르렀다면, 마을이 더욱 융성하고 오래도록 부귀영화를 누렸을 것이라고 아쉬워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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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군 용암리 석등(任實 龍巖里 石燈)

지정별 : 보물 제267호
시대 : 통일신라시대
지정일 : 1963.01.21
위치 : 전북 임실군 신평면 용암리 189
정보제공 : 임실군 문화관광과 063-640-2641
 
소개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이 등은 우리 나라에 있는 석등 가운데 두 번째로 큰 것이다. 아쉽게도 석등의 윗 부분이 파손되어 원래 모습이 손상되었지만, 섬세하고도 정교한 문양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팔각의 받침대에 새긴 연꽃과 구름무늬, 그리고 가늘고 길다란 안상(眼象)은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아직 선명히 남아 있다.

큼직한 귀꽃으로 장식된 덮개는 웅장한 느낌이 든다. 석등이 있는 중기사(中基寺)는 신라 중엽 때 처음 지었으나, 임진왜란(1592) 때 모두 불탔고 지금 건물은 1924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우리 나라의 석등으로는 가장 큰 유물의 하나로서, 높이는 5.18m에 이른다. 아깝게도 상륜부(相輪部)가 없어졌다. 8각의 지대석(地臺石) 위에 놓인 하대(下臺)는 2매석으로 되었으며, 8각 하대의 각 측면에는 안상(眼象)을 새기고 상하에는 굽을 돌렸다. 이 위에 올려진 하대석은 복엽의 복련(伏蓮)을 8각에 1판씩 조각하였다. 그 중앙 끝에는 큼직한 여의두형 귀꽃을 장식하였다. 그리고 이 복련대(伏蓮臺) 윗면에는 8각의 괴임을 새겼으며, 전면에는 구름 무늬를 새겨 돋보이도록 하였다. 간주석(竿柱石)은 원주형(圓柱形)으로 중앙에는 북 모양인 배가 부른 양각대(陽刻帶)가 있고, 그 상•하단의 주위에는 복엽8판(複葉八瓣)의 앙•복련(仰•伏蓮)을 대칭이 되도록 조각하였다. 상대석(上臺石)에는 작고 높은 2단의 둥근형 괴임이 새겨졌고 측면에는 단엽 8판의 앙련(仰蓮)이 새겨져 있고, 그 윗측면에는 8각형 굽을 돌렸다. 다시 화사석과의 사이에는 역시 8각의 굽을 돌린 받침돌을 끼웠다. 화사석(火舍石)은 8면에 모두 장방형의 화창을 내었다. 옥개석(屋蓋石)은 아랫면에 3단의 낮은 받침을 각출하였고 추녀의 낙수홈도 각이 낮다. 지붕에는 상부에 2중지붕을 장식하였고, 추녀에는 각각 여의두형 귀꽃을 세웠다. 옥개석 정상에는 현재 8각의 노반(露盤)과 앙화석(仰花石)만이 남아 있으나, 원래는 보개(寶蓋)와 보주(寶珠) 등 여러가지 상륜부재(相輪部材)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석등은 조각된 문양이 섬세하고 다양하며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대표적인 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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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군 운서정(雲棲亭)

지정별 : 도지정유형문화재 제135호
지정일 : 1990.06.30
위치 : 전북 임실군 관촌면 덕천리 산 52
정보제공 : 임실군 문화관광과 063-640-2641
 
소개
 울창한 숲 속에 자리한 운서정은 김승희(金昇熙)가 부친 김양근(金瀁根)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1928년부터 6년에 걸쳐 지은 것이다. 정각과 동, 서재, 가정문(嘉貞門) 등으로 이루어진 이 정자는, 일제 식민지 시절에 우국지사들이 모여 망국의 한을 달래던 곳이기도 하다.

운서정이 있는 사선대(四仙臺)는 신선이 놀던 곳이라는 전설이 있다. 옛날 진안 마이산과 임실 운수산의 네 산신들이 오원강 기슭에서 까마귀 떼와 함께 목욕을 즐기고 있었는데, 하늘에서 네 선녀가 내려와 이들을 모시고 가 버렸다. 그 후 이들 선녀와 신선들은 해마다 이 곳에 내려와 놀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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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군 이도리 미륵보살(任實 二道里 彌勒菩薩)

지정별 : 도지정유형문화재 제145호
지정일 : 1993.08.31
위치 : 전북 임실군 임실읍 이도리 210-2
정보제공 : 임실군 문화관광과 063-640-2641
소개
 고려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불상은 미륵부처상으로 높이는 2.54m이다. 검은색의 머리와 눈썹 그리고 수염, 붉은 입술에서 토속적인 색채가 강하게 풍긴다.

머리 무늬는 좌우 대칭으로 처리하였고, 손바닥에는 손금이 음각되어 있다. 충남 논산군 은진면 괸촉리에 있는 관촉사 미륵보살좌상입상에서 시작되는 고려 석불의 전통을 이은 이 불상은, 운수사 정면에 보이는 고덕산에서 흘러나오는 사악한 기운을 막기 위해 숲과 함께 만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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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군 이석용 생가(李錫庸 生家)

지정별 : 도기념물 제91호
지정일 : 1997.07.18
위치 : 전북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 676
정보제공 : 임실군 문화관광과 063-640-2641
 
소개
 이 집은 이석용이 태어나서 1903년까지 살던 곳으로 19세기 후반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이석용은 대한제국 융희 1년(1907) 고종이 퇴위하고 군대가 해산되자, 기삼연(奇三衍) 등 호남의 유림들과 호남의병 창의동맹단(湖南義兵 倡義同盟團)을 결성하였다. 이후 이석용은 의병장 김동신(金東臣)과도 합세하여 진안, 장수 등지에서 큰 성과를 올렸다.

이석용은 이후로도 끊임 없이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나, 1914년 4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서른 여섯의 나이로 대구형무소에서 처형되었다. 그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이 집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이석용의 숭고한 애국정신이 깃든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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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군 중기사지 석불연화좌대(中基寺址 石佛蓮華座臺)

지정별 : 도지정유형문화재 제82호
지정일 : 1977.12.31
위치 : 전북 임실군 신평면 용암리 76-1
정보제공 : 임실군 문화관광과 063-640-2641
소개
 불상을 올려놓기 위해 만든 이 두 개의 받침돌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한 기는 상대 중대 하대석이 모두 8각으로, 중대의 안상에는 합장한 좌불이 조각되어 있다. 다른 한 기는 상대가 반구형으로, 연꽃잎 문양이 겹꽃잎이며 양련으로 조각되어 있으며, 중대석은 8각으로 되어 있다.

두 손을 모으고 앉아 있는 부처의 모습이나 연꽃무늬에서 신라시대 뛰어난 석공의 솜씨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원래 이 받침돌들은 서쪽에 있는 광명제 옆에 방치되어 있었던 것을 1924년 중기사의 주지가 지금의 위치로 옮겨 불상을 봉안하였다고 한다. 중기사는 신라 중엽에 처음 지은 절로, 창건 당시의 웅장하던 모습은 경내에 서 있는 석등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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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군 학정리 석불상(鶴亭里 石佛)

지정별 : 도지정유형문화재 제87호
지정일 : 1979.12.27
위치 : 전북 임실군 삼계면 학정리 285
정보제공 : 임실군 문화관광과 063-640-2641
 
소개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이 불상은, 받침대 등 하반신이 아직 땅에 묻혀 있지만, 상체의 모습만으로도 상당한 규모임을 짐작할 수 있다. 큼직한 얼굴과 볼 아래까지 내려온 커다란 귀는 풍만하지만, 가는 눈과 작은 입은 다소 무거운 느낌을 준다. 머리는 6.25 때 떨어진 것을 다시 붙인 것이다.

어느 날 풀을 먹다가 달아난 소를 발견하고 화가 난 농부가 소에게 돌을 던졌으나, 잘못하여 석불의 코를 맞혀 석불의 코 귀퉁이가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농부는 그날부터 병을 앓다가 죽었는데, 주민들은 농부의 죽음을 석불이 내린 벌이라 생각하고, 석불을 두려워하게 되었다는 애기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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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군 효자정려비 및 정판(孝子旌閭碑 및 旌板)

지정별 : 도지정유형문화재 제144호
지정일 : 1993.08.31
위치 : 전북 임실군 임실읍 정월리 561
정보제공 : 임실군 문화관광과 063-640-2641
소개
 이 정려각은 김해 김씨인 김복규(金福圭)와 그의 아들 김기종(金箕鐘)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조선 철종 6년(1855)에 세운 것이다. 하늘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한 이들 부자의 지극한 효심은 죽음 직전에 놓인 부모님을 여러 차례 구하여 천수를 누리게 하였고, 김복규가 죽은 후 삼 년간 시묘살이를 하던 김기종은 매일 호랑이 울음 같은 소리를 내며 애통해 하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마을의 이름도 호동으로 바뀌었다는 얘기가 전한다. 이들 부자의 효심은 나라 전체에 널리 알려져 김복규에게는 사후에 높은 벼슬을 내려 주었고, 또 비를 세워 부자의 효행을 만천하에 널리 알리도록 하였다. 비문은 명필로 유명한 추사 김정희가 쓴 것이다.
 

임실 필봉농악(任實 筆峰農樂) (설장고, 박형래)

지정별 : 중요무형문화재 제11-5호
지정일 : 1989.06.15
보유자 : 박형래
위치 : 전북 임실군 강진면 필봉리 268
소개
  필봉농악은 필봉리에 전승되는 농악을 말한다. 필봉리에서는 예로부터 마을의 수호신인 당산(堂山)에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당산굿, 정초에 집집을 돌며 잡귀를 물리치는 마당밟기, 마을사람들의 놀이판인 판굿 등 여러 종류의 농악이 전한다. 필봉농악의 기능보유자로는 장고에 박형래(朴炯來)씨와 상쇠에 양순용(梁順龍)씨가 있다.

평생을 장고와 함께 살아온 박형래씨는 1980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바 있다. 어렸을 때부터 꽹가리에 남다른 재주를 보여 풍물동(童)이라고 불리던 양순용씨는 부친과 박학삼으로부터 농악을 배웠으며, 필봉농악의 보존과 전수에 온 정열을 다하였다.
필봉농악은 호남좌도농악 중의 하나로서 본래는 당산굿•마당밟기 정도의 단순한 농악으로 전승되어 왔으나, 1920년대 이곳 임실군 덕치면 출신인 박학삼에 의하여 현재와 같은 수준으로 발전되었다. 그후 상쇠 송주호에 의해 계승되다가 상쇠 양순용과 설장고 박형래에 의해 계승 발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필봉농악의 특징은 농악 고유의 원형(7채 가락)을 잘 보존 전승하고 있다는데 있다. 특히 빠른가락을 진행하면서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영산가락 짝드름을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호남우도농악에서 볼 수 있는 구성진 멋과 영남농악의 씩씩함을 고루 지니고 있다. 이 농악의 판굿은 굿머리가락•외마치질굿•오채질굿•채굿•호허굿•풍류굿(느린풍류굿•판풍류굿)•방울진굿•미지기영산•노래굿•돌굿(춤굿)•영산굿•수박치기•등지기•군영놀이•도둑잽이•탈머리굿 등의 순서로 구성된다. 이 가운데 영산굿, 서로의 손바닥을 치는 수박치기, 도둑잡는 연극인 도둣잽이굿, 서로 등대고 기대는 등지기, 군영놀이 등에서 이 농악의 특징이 잘 나타난다.

출처 : 임실을 사랑하는 사람들
글쓴이 : 바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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