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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향 임실/임실군 자료

호남로, 삼계도, 오수도, 오수역, 오원역

by 임실사랑 2021. 8. 29.

호남로(湖南路) 

정의

조선시대 전라도 지역에 설치된 도로망을 통칭하는 말로, 호남로에는 벽사도‧오수도‧경양도‧제원도‧청암도‧삼례도 등 6개의 역도와 그 속역들이 포함되었음. 

개설

조선시대의 역(驛)은 병조-승여사(乘輿司)-역승(驛丞)‧찰방(察訪)-속역(屬驛) 체제에 따라 관리 및 감독되었다. 역도는 고려초기 6과(六科) 체제가 후기의 22역도 체제로 개편되면서 제도적으로 정비되었다.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세종대에 44역도-537속역 체제로 재편되었으며, 세조대에 이르러 41역도-543속역 체제가 확립됨으로써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역도 체제가 형성되었다. 호남로(湖南路)는 전라도 지역의 교통로들을 통칭하는 말로, 공식적으로 사용된 명칭이 아니라 조선시대에 관습적으로 쓰이던 용어였다. 호남로상에는 조선시대의 41역도 중 벽사도(碧沙道)‧오수도(鰲樹道)‧경양도(景陽道)‧제원도(濟原道)‧청암도(靑巖道)‧삼례도(參禮道)와 그 속역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내용 및 특징

호남로상에는 전라좌도와 전라우도에 설치된 6개의 역도와 그 속역들이 포함돼 있었다. 제1역도는 벽사도로, 장흥의 벽사역(碧沙驛)을 중심으로 가신역(可申驛)‧파청역(波靑驛)‧양강역(楊江驛)‧낙승역(洛昇驛)‧진원역(鎭原驛)‧통로역(通路驛)‧녹산역(綠山驛)‧별진역(別珍驛)‧남리역(南利驛) 등으로 구성되었다. 제2역도는 오수도로, 남원의 오수역(鰲樹驛)을 중심으로 창활역(昌活驛)‧동도역(東道驛)‧응령역(應嶺驛)‧인월역(引月驛)‧잔수역(潺水驛)‧지신역(知申驛)‧양율역(良栗驛)‧낙수역(洛水驛)‧덕양역(德陽驛)‧익신역(益申驛)‧섬거역(蟾居驛)으로 편성되었다. 제3역도는 경양도로, 오늘날의 광주에 해당하는 광산의 경양역(景陽驛)을 중심으로 덕기역(德奇驛)‧가림역(加林驛)‧인물역(人物驛)‧검부역(黔富驛)‧창신역(昌新驛)‧대부역(大富驛) 등으로 이루어졌다. 제4역도는 제원도로, 금산의 제원역(濟原驛)을 중심으로 달계역(達溪驛)‧단암역(丹巖驛)‧옥포역(玉包驛) 등으로 구성되었다. 제5역도는 청암도로, 장성의 청암역(靑巖驛)을 중심으로 영신역(永申驛)‧선암역(仙巖驛)‧신안역(申安驛)‧녹사역(綠沙驛)‧가리역(加里驛)‧영보역(永保驛)‧경신역(景申驛)‧광리역(光利驛)‧오림역(烏林驛)‧청송역(淸松驛) 등으로 편성되었다. 마지막 제6육도는 삼례도로, 전주의 삼례역(參禮驛)을 중심으로 반석역(半石驛)‧오원역(烏原驛)‧갈담역(葛潭驛)‧소안역(蘇安驛)‧재곡역(材谷驛)‧앵곡역(鶯谷驛)‧거산역(居山驛)‧천원역(川原驛)‧영원역(瀛原驛)‧부흥역(扶興驛)‧내재역(內才驛) 등으로 구성되었다.  

변천

호남로는 고려시대의 22역도 가운데 승나주도(昇羅州道)‧산남도(山南道)‧남원도(南原道)와 전공주도(全公州道)의 일부를 계승해 성립하였다. 조선초에 전국적인 역도-속역 체제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충청도 지역의 역도는 창활도(昌活道)‧앵곡도(鶯谷道)‧제원도‧벽사도‧삼례도‧청암도‧경양도 등으로 정비되었다. 그 뒤 세조대에는 역제가 세 차례나 개편됨에 따라 호남로상에 있는 역도와 속역들 또한 계속해서 변화를 겪었다. 1457년(세조 3)의 1차 개편 때는 제원도‧오수도의 모든 속역과, 삼례도의 오포역, 영보도(永保道)의 낙승역, 경양도의 창신역‧대부역 등이 오수도로 통합되었다. 또 삼례도‧앵곡도‧경양도의 모든 속역과, 청암도의 단암역‧영신역, 영보도의 가신역‧파청역‧양강역 등이 삼례도로, 청암도‧영보도의 모든 속역과 삼례도의 소안역‧재곡역, 앵곡도의 부흥역‧내재역‧영원역 등이 영보도로 통합되었다. 1460년(세조 6)의 2차 개편 때는 오수도에 속한 25개 역 가운데 광리역‧오리역이 영보도로 이속되었으며, 영보도에 속한 20개 역 중 단암역‧청송역이 삼례도로 이속되었다. 이어 1462년(세조 8)의 3차 개편에서는 삼례역‧앵곡역‧반석역‧오원역‧갈담역‧소안역‧촌곡역(村谷驛)‧양재역(良才驛)‧거산역‧천원역‧영원역‧부흥역‧내재역 등 13개 역이 삼례도찰방(參禮道察訪)으로, 오수역‧창활역‧동도역‧응령역‧인월역‧지신역‧잔수역‧양율역‧낙수역‧덕양역‧익신역‧삼거역 등 12개 역이 오수도찰방(鰲樹道察訪)으로, 청암역‧영신역‧선암역‧신안역‧녹사역‧가리역‧경신역‧광리역‧오림역‧여보역‧단암역‧청송역 등 12개 역이 청암도찰방(靑巖道察訪)으로 편성되었다. 또한 제원역‧달계역‧소천역‧단령역(丹嶺驛)‧옥포역 등 5개 역은 제원도역승(濟原道驛丞)으로, 벽사역‧진원역‧통로역‧별진역‧남리역(南利驛)‧녹산역‧가신역‧파청역‧양강역‧낙승역 등 10개 역은 벽산도역승(碧沙道驛丞)으로, 경양역‧덕기역‧가휴역(加休驛)‧인물역‧검부역‧창신역‧대부역 등 7개 역은 경양도역승(景陽道驛丞)으로 정비되었다. 호남로는 이후 조선시대의 역제가 확립된 『경국대전』 체제에서 벽사도‧오수도‧경양도‧제원도‧청암도‧삼례도 등 6개 역도로 구성되어, 역참 제도가 폐지되는 1896년(고종 33)까지 존속하였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경국대전(經國大典)』■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만기요람(萬機要覽)』■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지도서(輿地圖書)』■ 조병로, 『조선전기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오일순, 「고려시대 역제의 변동과 잡색역」,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0.■ 정요근, 「고려전기 역제의 정비와 22역도」, 『한국사론』45, 2001.■ 정요근, 「고려‧조선초의 역로망과 역제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출처 : 조선왕조실록사전  삼례도(參禮道) 

정의

조선시대에 전라도 전주의 삼례역을 중심으로 설치한 역도. 

개설

삼례도(參禮道)는 조선시대의 41역도(驛道) 중 하나로, 전남우도의 여산-장성, 전주-남원, 전주-순창, 함열-옥구, 함열-고부 등을 연결하는 역로를 관할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삼례도의 속역은 13개 역이었으며, 중심 역은 삼례역(參禮驛)이었다. 

내용 및 특징

삼례도는 청암도(靑巖道)와 더불어 전라우도에 속한 역도로, 여산(礪山)-전주(全州)-금구(金溝)-태인(泰仁)-정읍(井邑)-장성(長城) 방면으로 이어지는 역로와, 전주-남원(南原), 전주-순창(淳昌), 함열(咸悅)-임피(臨陂)-옥구(沃溝), 함열-만경(萬頃)-부안(扶安)-고부(古阜)로 이어지는 역로를 관할하였다. 조선초기에는 역승(驛丞)이 소재하였으나, 세조대 이후 찰방(察訪)이 파견되어 역무를 관장하였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삼례도에는 삼례역을 비롯해 반석역(半石驛)·오원역(烏原驛)·갈담역(葛覃驛)·소안역(蘇安驛)·재곡역(才谷驛)·양재역(良才驛)·앵곡역(鶯谷驛)·거산역(居山驛)·천원역(川原驛)·영원역(瀛原驛)·부흥역(扶興驛)·내재역(內才驛) 등 13개 역이 소속되어 있었다. 그 중 삼례역·반석역·양재역·앵곡역 등은 중로(中路)에, 나머지는 소로(小路)에 해당하였다.  

변천

삼례도는 조선시대에 들어서 성립되었지만, 이 역도의 연원은 고려의 역도 체제에서 비롯되었다. 삼례도는 고려시대의 22역도 중 전공주도(全公州道)·산남도(山南道)·남원도(南原道)에 속한 일부 역을 계승하여 조선 세종 때 성립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삼례도의 속역은 반석역·양재역·오원역·재곡역·소안역·옥포역(玉包驛) 등 6개 역이었다. 그 뒤 1457년(세조 3)에는 각 역의 관할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삼례도의 속역인 공산의 옥포역은 오수도(獒樹道)로, 임피의 소안역은 영보도(永保道)로 이속하였다. 그리고 삼례도의 나머지 속역 및 앵곡도(鶯谷道)·경양도(景陽道)의 모든 속역과, 청암도(靑嚴道)의 속역인 단암역(丹嚴驛)·영신역(永申驛)과, 영보도의 속역인 가신역(可申驛)·파청역(波淸驛)·양강역(陽江驛) 등을 삼례도로 편성하는 한편 역승을 혁파하고 정역찰방을 두었다. 1460년(세조 6)에는 영보도의 속역인 단암역과 청송역(靑松驛)을 삼례도로 이속하였다. 이어 1462년(세조 8)에는 각 도의 역참을 혁파하고 역로를 정비하면서, 삼례역·앵곡역·반석역·오원역·갈담역·소안역·촌곡역·양재역·거산역·천원역·영원역·부흥역·내재역 등 13개 역을 삼례도찰방의 관할 아래에 두었다. 1550년(명종 5)에는 삼례도가 극히 피폐하여, 삼관(三館) 즉 홍문관·예문관·교서관의 박사(博士) 이하 관원 중에서 명망 있는 사람을 뽑아 찰방을 겸직하도록 하였다. 순조 연간에 편찬된 『만기요람(萬機要覽)』에 따르면, 삼례도에는 반석역·앵곡역·양재역·거산역·천원역·갈담역·오원역·재곡역·소안역·내촌역·부흥역·영원역 등 12개 역이 소속되어 있었다. 삼례도는 이후 갑오개혁 때까지 존속하다가, 1896년(고종 33)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역참 제도가 폐지되면서 함께 철폐되었다. 참고문헌『고려사(高麗史)』『경국대전(經國大典)』『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만기요람(萬機要覽)』『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여지도서(輿地圖書)』『호남읍지(湖南邑誌)』조병로, 『조선전기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오일순, 「고려시대 역제의 변동과 잡색역」,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0.정요근, 「고려전기 역제의 정비와 22역도」, 『한국사론』45, 2001.정요근, 「고려·조선초의 역로망과 역제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출처 : 조선왕조실록사전   오수도(獒樹道) 

정의

조선시대에 전라도 남원의 오수역을 중심으로 편성한 역도. 

개설

오수도(獒樹道)는 세종대의 창활도(昌活道)를 계승한 역도(驛道)인데, 오수도로 개칭한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세조 이전 시기로 추정할 뿐이다. 1462년 역도를 개편하면서 오수역·창활역·동도역·응령역·인월역·지신역·잔수역·양률역·낙수역·덕양역·익신역·섬거역 등 12개 속역이 오수도에 배속되었다. 

내용 및 특징

오수도는 삼례도(蔘禮道)·청엄도(靑嚴道)·제원도(濟原道)·벽사도(碧沙道)·경양도(景陽道)와 더불어 전라도 지역에 설치된 역도이다. 오수역(獒樹驛)·창활역(昌活驛)·동도역(東道驛)·응령역(應嶺驛)·인월역(引月驛)·지신역(知申驛)·잔수역(潺水驛)·양률역(良栗驛)·낙수역(洛水驛)·덕양역(德陽驛)·익신역(益申驛)·섬거역(蟾居驛) 등 12개 속역으로 편성되었으며, 세조대에는 그 중심 역인 창활역에 찰방(察訪)을 파견하였다. 남원-운봉, 남원-구례-순천-광양-하동, 순천-전라좌수영, 남원-곡성-낙안 등지로 연결되는 역로(驛路)를 관할하였는데, 오수도의 속역은 모두 소로(小路) 또는 소역(小驛)에 속하였다. 오수도는 1896년(고종 33) 1월 18일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변천

고려의 역도를 계승한 조선 왕조가 언제부터 역도를 개혁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태종과 세종대를 거치며 지속적으로 역도를 개편하였다. 그 뒤 1457년(세조 3) 9월에 병조의 수교관문(受敎關文)에 의거하여 이조에서 올린 계(啓)에 따르면, 국도(國都) 주변의 경기 여러 역과 강원·충청도의 일부 역을 합속하여 경기좌우도(京畿左右道)·경기충청좌우도(京畿忠淸左右道)·경기충청도(京畿忠淸道)·경기강원도(京畿江原道) 등 6개 역도로 나누어 역승(驛丞)을 폐지하고 정역찰방(程驛察訪)을 설치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역도-속역 체제의 개편 과정에서 전라도 지방의 역도는 1460년(세조 6)과 1462년(세조 8)의 개편을 통해 일부 역도가 통합되면서 완성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창활도는 오수역·잔수역·갈담역(葛潭驛)·은령역(銀嶺驛)·통도역(通道驛)·인월역·익신역·섬거역·양률역·낙수역·지신역 등 11개 속역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언제 오수도로 개칭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1457년에 제원도와 오수도의 모든 역과, 삼례도에 속한 고산의 옥포역(玉包驛), 영보도(永保道)에 속한 낙안의 낙승역(樂昇驛), 경양도에 소속된 순창의 창신역(昌新驛) 및 옥과의 대부역(大富驛) 등을 한 도로 합하여 오수도라고 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오수도라는 이름이 생긴 것은 세조 이전으로 추정할 수 있다. 1460년에는 오수도의 광리역(廣里驛)과 오림역(吾林驛)을 영보도로 귀속시켰다. 그리고 1462년에는 역도를 개편, 확정하면서 오수역·창활역·동도역·응령역·인월역·지신역·잔수역·양률역·낙수역·덕양역·익신역·섬거역 등 12개 속역을 오수도에 배속하였다. 1808년(순조 8)에 편찬된 『만기요람(萬機要覽)』과 1865년(고종 2)에 편찬된 『대전회통(大典會通)』을 살펴보면, 오수도의 속역 구성이 조선시대 후기까지 그대로 유지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오수도의 운영 실태는 영조대에 편찬된 『여지도서』와 1895년에 편찬된 『호남역지』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오수도의 속역별 역리와 역마 및 마호 배속 현황을 정리한 것이 다음의 <표 1>, <표 2>이다. 

참고문헌

『만기요람(萬機要覽)』『호남역지(湖南驛誌)』조병로, 『韓國近世 驛制史硏究』, 국학자료원, 2005.유선호, 「朝鮮初期의 驛路와 直路」, 『역사교육』70, 1999. 출처 : 조선왕조실록사전  

<1> 오수도의 역리 현황

역명 소재지 역리 역노 역비 역보 솔정 일수 인호(人戶)
오수 남원 613(727) 120(178) 57(42) 322 161 10 360
동도 남원 18(9) 17(10) 14(0) 16 8 10 45
응령 남원 14(9) 20(16) 4(0) 26 13 10 34
창활 남원 12(8) 25(10) 3(0) 18 9 10 50
지신 곡성 0(25) 3(16) 5(3( 16 8 10 73
낙수 순천 152(59) 187(52) 66(1) 42 21 10 82
양율 순천 78(89) 43(20) 25(0) 42 21 10 156
덕양 순천 222(62) 86(23) 47(0) 66 33 10 160
익신 광양 24(39) 7(47) 3(1) 42 21 10 80
섬거 광양 11(97) 10(29) 9(0) 26 13 10 51
잔수 구례 104(26) 4(15) 1(0) 20 10 10 80
인월 운봉 0(138) 15(39) 13(3) 28 14 10 45
합계 12 1248 537 247 664 332 120 1216

역리, 역노, 역비의 ( ) 안 수치와 역보, 솔정, 일수, 인호의 수치는 호남읍지, 오수역지(1872)의 통계임  <표2> 호남역지에 나타난 오수도의 속역별 역마와 마호 수

역명 소재지 역 마 마 호
오수 남원 15 15
동도 남원 4 4
응령 남원 6 6
창활 남원 4 4
지신 곡성 4 4
낙수 순천 10 10
양율 순천 8 8
덕양 순천 10 10
인신 광양 10 10
섬거 광양 6 6
잔수 구례 4 4
인월 운봉 4 4
합계   85匹 85戶

 

오수역(獒樹驛)

 

대표표제 오수역
한글표제 오수역
한자표제 獒樹驛
분야 경제/교통/육운
유형 집단·기구
지역 대한민국
시대 조선(朝鮮)
집필자 이승민
설치 시기 10세기경
폐지시기 1896(건양 1) 1
소속 관서 병조(兵曹)

 

정의

조선시대 전라도의 도로망인 오수도에 속한 역으로, 오늘날의 전라남도 임실군에 위치해 있었음. 

개설

고려시대에는 성종에서 문종 연간에 역로(驛路)를 22역도(驛道)-525속역(屬驛) 체제로 정비하였는데, 오수역(獒樹驛)은 이때 남원도(南原道) 거령(居寧)에 위치해 있던 역이다. 조선시대에는 세종대에는 창활도(昌活道)에 속했다가, 세조대에 창활도가 오수도로 개칭·통합되면서 오수도(獒樹道)의 본역이 되었다. 그 뒤 갑오개혁 때까지 존속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사(高麗史)』 참역(站驛) 조에 따르면 오수역은 고려시대부터 전주 남원현 거령 지역에 설치되어 있었으며, 남원도에 속한 12개소의 역 가운데 하나였다. 정확한 설치 시기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고려의 역제(驛制)가 22역도-525속역 체제로 정비된 995년(고려 성종 14)에서 1067년(고려 문종 21) 사이에 남원도에 소속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세종대에 전국적으로 역도-역로 조직을 갖추는 과정에서 전라도의 역도인 창활도에 소속되었다. 세조대에는 제원도(濟原道)·삼례도(參禮道)·영보도(永保道)·경양도(景陽道)에 속한 일부 역들과 함께 오수도로 통합되면서 오수도에 속하게 되었다. 

조직 및 역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남원 편에 따르면, 오수역에는 역마 15필과 역리(驛吏) 613명, 역노(驛奴) 120명, 역비(驛婢) 57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또한 오수역은 오수도의 본역(本驛)이었으므로, 문관 종6품의 오수도 찰방(察訪)이 주재하며 역에 관한 각종 업무를 맡아보았다. 그런데 1872년(고종 9)에 편찬된 『호남읍지(湖南邑誌)』「오수역지(獒樹驛誌)」에는 역리 727명, 역노 178명, 역비 42명으로 되어 있어 차이를 보인다. 그밖에도 역보(驛保) 322명, 일수(日守) 10명, 솔정(率丁) 161명, 인호(人戶) 360명 등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1895년(고종 32)에 편찬된 『호남역지(湖南驛誌)』에 따르면 아전 24명, 서자(書者) 21명, 통인(通引) 17명, 마호(馬戶) 15명, 급창(及唱) 7명, 사령(使令) 12명, 방자(房子) 5명, 비자(婢子) 7명, 마종(馬從) 15명, 보종(步從) 15명과 기타 역보·일수·솔정 등도 있었다. 이로 미루어 조선후기에는 역민의 구성이 매우 다양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한편, 오수역에는 마가청(馬價廳)·유경청(留京廳)·마호청(馬戶廳)·보급청(補給廳)·역가청(役價廳)·신혜별청(新惠別廳)·공수청(公須廳) 등의 역사(驛舍) 건물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부역실총(賦役實總)』에 따르면 오수역의 차비전(差備錢)은 891냥이었다. 

변천

조선전기 세종대에는 전국적인 규모의 역로를 조직했는데, 이때 오수역은 창활도역승이 관할하는 12개 역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역역(驛役) 중에는 긴급한 군사 정보나 왕명을 전달하는 일 외에도 사신 왕래에 따른 영송(迎送)과, 공적인 일로 지방에 나간 고관의 먹을 것과 쓸 물품을 공급하는 지대(支待) 및 역마를 길러 바치는 입마(立馬)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사신 왕래에 대한 기별은 역리가 직접 달려가 전달하였다. 세종 연간에 창활도의 본역은 창활역이었는데, 전라도로 내려가는 통영로의 첫 역은 창활역이 아닌 오수역이었다. 더욱이 오수역과 창활역의 거리가 60리나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역리가 사신을 영송하는 데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그리하여 1439년(세종 21)에 창활도의 본역을 오수역으로 바꾸게 되었다[『세종실록』 21년 6월 10일].세조대에 들어와서는 창활도를 오수도로 개칭하면서 오수도에 속하게 되었다. 그 뒤 1457년(세조 3)에는 제원도·오수도·삼례도·영보도·경양도의 일부 역을 오수도로 통합했는데[『세조실록』 3년 9월 12일], 그 과정에서 오수역은 오수도의 본역이 되었다. 또 1462년(세조 8)에는 병조의 건의에 따라 각 도의 역참을 파하고 역로를 정비해 찰방과 역승을 두게 했는데, 이때 창활역 등과 함께 오수도 찰방의 관할로 확립되었다[『세조실록』 8년 8월 5일]. 그 뒤 조선후기까지 존속했으나, 1896년(건양 1)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철폐되었다.오수역은 『여지도서』·『대동지지(大東地志)』 등에 따르면 남원도호부 북쪽 40리 지점에 있었다. 오늘날의 행정 구역으로는 전라북도 임실군에 해당한다.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조선총독부 중추원 역원 조사표」에는 임실군 둔남면 오수리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둔남면은 1992년에 지방자치법에 의해 오수면으로 개칭되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여지도서(輿地圖書)』『대동지지(大東地志)』『호남읍지(湖南邑誌)』『호남역지(湖南驛誌)』『부역실총(賦役實總)』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오원역(烏原驛)

 

대표표제 오원역
한글표제 오원역
한자표제 烏原驛
분야 경제/교통/육운
유형 집단·기구
지역 대한민국
시대 조선(朝鮮)
집필자 이승민
설치 시기 10세기경
폐지시기 1896(건양 1) 1
소속 관서 병조(兵曹)

 

정의

조선시대 전라도의 도로망인 삼례도에 속한 역으로, 오늘날의 전라북도 임실군에 위치해 있었음.

개설

고려시대 성종에서 문종 연간에 역로(驛路)를 22역도(驛道)-525속역(屬驛) 체제로 정비할 때, 오원역(烏原驛)은 남원도(南原道) 임실(任實)에 위치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세종대와 세조대를 거치면서 전국의 역로가 41역도-543속역 체제로 정비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삼례도(參禮道)를 구성하는 역의 하나가 되었다. 그 뒤 조선후기까지 존속하였으나, 1896년(건양 1) 1월에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사(高麗史)』 참역(站驛) 조에 따르면 오원역은 남원도에 속한 12개소의 역 가운데 하나로, 고려시대부터 전라도 임실 지역에 설치되어 있었다. 정확한 설치 시기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고려의 역제(驛制)가 초기의 6과-147역 체제에서 22역도-525속역 체제로 정비된 995년(고려 성종 14)에서 1067년(고려 문종 21) 사이에 남원도에 소속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세종대에 전국적인 역도-역로 조직이 마련되면서 삼례역(參禮驛)·반석역(半石驛) 등과 함께 삼례도에 속하게 되었다.

조직 및 역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임실현 편에 따르면, 오원역에는 역마 10필과, 역리(驛吏) 75명, 역노(驛奴) 68명, 역비(驛婢) 37명이 배속되어 있었다.변천조선전기 세종 연간에 전국적인 역로 조직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세조대에는 찰방(察訪)이 관할하는 역이 많고 또 역로가 멀어서 찰방이 순시하거나 사신이 왕래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그 결과 역로가 쇠퇴하는 등의 폐단이 나타났다. 그에 따라 1462년(세조 8)에는 각 도의 역참을 파하고 역로를 새롭게 정비했는데, 오원역은 그 과정에서 삼례도찰방 관할이 되었다[『세조실록』 8년 8월 5일]. 그 뒤 조선후기까지 삼례도에 속한 역으로 존속하였다. 1896년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오원역의 위치는 『여지도서』·『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대동지지(大東地志)』 등에 모두 남원도호부 임실현 북쪽 20리 지점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조선총독부 중추원 역원 조사표」에는 임실현 북쪽 20리 지점인 임실군 오천면 선천리에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는데, 선천리는 1935년에 관촌리로 개칭되었다. 오늘날의 위치는 전라북도 임실군 관촌면 관촌리 일대이다. 관촌리는 오원역이 있었던 관계로 오원·역촌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여지도서(輿地圖書)』『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대동지지(大東地志)』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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