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고향 임실/임실군 자료

3.1 독립운동가 박준승 선생

by 임실사랑 2014. 3. 20.

 

성명 박준승
생존기간 1866.11.24 ~ 1927.3.23
출생지 전북 임실
운동계열 3.1운동
사망지 전북 정읍
훈격(연도) 대통령장 (62)


 

“조선은 4천년 전에 건국하였으며 나도 날 때는 독립국 국민이었다. 그런데 일본에 병합되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독립할 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은 구주(歐洲)에서 국제연맹회의를 하고 있는 고로 이 좋은 기회에 독립하지 아니하면 안될 줄로 생각한다.”

-선생의 공판기록 중 진술내용-

 

 

외세와 봉건 지배층의 침탈을 보며 현실에 눈뜨다

 

박준승(朴準承, 1865. 11. 24∼1927. 3. 24)선생은 1865년 전라북도 임실군 청웅면 남산리에서 출생하였다. 선생의 호는 자암(泚菴)이다. 어려서부터 사숙(私塾)에서 한학을 수학하면서 농업에 종사하던 선생은 20대에 이르러 현실 문제에 눈뜨기 시작하였다. 개항 이후 물밀듯이 몰려드는 외세와 그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위정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선생은 점차 우국청년으로 성장하여 갔다. 특히 일본과 청국 상인들이 공산품을 가져와 비싸게 팔고 그 대신 싼 값으로 미곡을 구입하여 대량으로 반출하기 시작하면서 급격히 피폐해진 농촌의 현실은 선생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양반 지배층은 도탄에 빠진 민생의 문제를 도외시하고 자신들의 배를 불리기에 급급하였고, 나아가 외세와 결탁하여 일반 민중에 대한 수탈을 강화하고 있었다. 농업을 생업으로 하던 선생은 그 같은 외세와 봉건 지배층의 침탈을 목격하고 체험하면서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반(反)침략, 반(反)봉건의 운동방략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기 그 같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근대민족운동은 두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하나는 선각적 양반을 중심으로 중인 지식인과 양인 상공업 자본가들에 의해 추진되고 있던 위로부터의 개화, 개혁운동이었고, 다른 하나는 일반 민중이 주체가 된 밑으로부터의 혁명운동이었다. 전자의 운동이념이 된 것은 개화사상이었고, 후자의 운동이념이 된 것은 동학사상이었다. 그러나 외국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여 근대화를 이루고자 한 개화사상은 필연적으로 반(反)외세의 문제에 취약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으며 외세의 침탈로 궁핍화 현상이 심화되어 일반 민중에게는 지지를 얻을 수 없었다. 이와는 반대로 보국안민(輔國安民)을 기치로 1860년 최제우에 의해 제창된 동학사상은 본래 종교이념이었지만, 외세의 침략이 구체화되고 봉건 지배층의 수탈이 지속적으로 자행되는 상황에서 그를 극복하려는 사회 변혁이념으로 전화하여 기능하면서 일반 민중의 폭넓은 지지를 획득하여 갔다. 

 

동학에 입교 후 민족의식 고취활동

 

선생은 민중의 입장에서 반침략, 반봉건의 동학사상에 공감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1891년 동학에 입교하였다. 이 시기 동학은 제2대 교주 최시형의 헌신적 노력으로 교리를 정리하는 한편 전국적인 포교조직을 구축하여 비약적인 교세확장을 이루어 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를 기반으로 교조 최제우의 신원을 통한 포교의 자유를 획득하고자 1892년 전북 삼례와 1893년 충남 보은 등지에서 대중적인 집회를 개회하여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특히 보은 집회에는 2만여 명의 동학교도가 참여하여 교조 신원은 물론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와 ‘제폭구민(除暴救民)’ 등의 정치적 요구를 주장하였다. 1894년 1월 고부(古阜)민란을 계기로 동학농민혁명운동이 발발하자, 동학교도이자 농민대중의 한 사람으로 선생 또한 동학농민혁명운동에 동참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호남 일대에서 생명을 담보로 투쟁하였지만, 일제의 간섭과 탄압으로 동학농민혁명운동이 실패함에 따라 외세를 몰아내고 봉건체제를 타파하여 자주적 근대민족국가를 건설하려던 선생의 꿈이자 당시 민중의 꿈은 좌절되고 말았다.

 이후 선생은 이른바 ‘동학잔당’을 색출하여 잔혹하게 학살하는 일제와 친일 정권의 촉수를 피해 여기저기를 전전하면서 온갖 고초를 겪었지만, 결코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동학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리하여 1897년 전라도 지역의 동학 접주로 선임된 선생은 동학농민혁명운동으로 와해된 포교조직을 재건하고 교세를 만회하기 위하여 혼신의 정력을 쏟아 부었다. 1904년 동학교도들을 중심으로 개화운동단체 진보회가 조직되지만 진보회가 친일단체 일진회로 변질되자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명하고 일진회 주동자를 처단하여 사회개혁과 민족종교로서의 정통성을 수호하였다. 이때 선생은 전라도의 유력한 접주로서 동학의 갑진(甲辰)개혁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손병희와 박인호를 추종하면서 이용구 일당에 대항하여 교인들을 수습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여 주권수호운동에 앞장섰다. 

 

천도교 전라도 순유 위원장으로 활동

 

이후 선생은 1908년 천도교 수접주(首接主)가 되었고, 1912년부터는 전남 장성군 천도교 대교구장 겸 전라도 순유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1916년 선생은 천도교 전라도 도사에 임명되어 종교 활동을 통해 민족의식과 배일사상을 전파하여 갔다. 이 같은 선생의 활동은 민족 독립을 염원하는 선생의 의지이기도 하였지만, 이 시기 천도교 교단의 뜻이기도 하였다. 1910년대는 일제의 무단정치가 자행되는 암흑과 같은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천도교는 각종 교리강습회와 수련회를 개최하여 암암리에 민족의식을 배양하면서 민족의 앞날을 열어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16년부터 천도교도들을 동원하여 독립만세시위운동을 일으킬 것을 교주에게 요청하는 신도가 있었는가 하면, 1917년에도 같은 요청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특히 1917년 겨울에는 김시학의 발의로 우선 천도교, 기독교, 유림 3종단이 연합하고, 사회계와 구관료계의 저명 인사들을 포섭한 독립운동 계획을 추진하기까지 하였다.

1918년 1월 8일 미국 대통령 윌슨이 연두교서에서 제1차 대전 이후 강화원칙의 일환으로 민족자결주의를 천명하자, 손병희를 중심으로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 천도교 지도자들은 다시 독립운동 계획을 추진하여 갔다. 이들은 중앙학교측의 인사들과 합세하여 독립운동 계획을 진행시키던 중, 1919년 1월 상순 재일 한국 유학생들이 밀사로 국내에 파견한 송계백으로부터 2.8독립선언 계획을 듣게 되었다. 이에 손병희는 “젊은 학생들이 이같이 의거를 감행하려는 이때에 우리 선배들로서는 좌시할 수 없다”고 하면서 독립운동 계획을 가속화하고, 나아가 다른 종교계와 접촉하여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모색하도록 하였다. 이에 기독교, 불교계와의 접촉이 이루어져 종교계의 연합전선이 구축되었고, 여기에 학생층이 참여하여 민족대연합전선을 형성함에 따라 3. 1운동 계획은 일원화되어 일사불란하게 추진되었다.

선생은 3.1운동 계획이 막바지에 이른 시기인 2월 24일 천도교 전라도 도사로서 교주 손병희에게 기도회의 종료를 보고하고, 1월 21일 붕어(崩御)한 광무황제의 국장에 참배하기 위해 상경하였다. 그리하여 다음날 선생은 손병희를 방문한 뒤, 이어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권동진을 만났다. 이때 선생은 그로부터 “총독부에 건의서를 제출하여 조선은 독립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나는 본래부터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터인 만큼 찬성한다” 라고 주저 없이 말하면서 3.1운동 계획에 참여하였다. 이로써 선생은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최린, 임예환, 권병덕, 나인협, 홍기조, 김완규, 나용환, 홍병기, 양한묵, 이종훈, 이종일 등과 함께 천도교측 민족대표 15인 가운데 1인으로 선임되어 독립선언서와 독립통보서 등에 서명 날인하게 되었다.

 

민족대표 33인 중 1인으로 독립선언식 참석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서 선생을 비롯한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서를 앞에 놓고 역사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한용운이 대표로 “오늘 우리가 집합한 것은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기 위한 것으로 자못 영광스러운 날이며, 우리는 민족대표로서 이와 같은 선언을 하게 되어 책임이 중하니, 금후 공동 협심하여 조선 독립을 기도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라고 하는 요지의 식사(式辭)를 하였고, 마지막으로 참석자 모두는 독립만세를 3창함으로써 거족적인 3.1운동의 불을 지폈다. 선생을 비롯한 민족대표들은 출동한 일경에게 피체되어 경무총감부로 압송되었다. 선생은 경무총감부에서 “왜 독립운동을 하였는가” 라는 일경의 질문에, “조선은 4천년 전에 건국하였으며 나도 날 때는 독립국 국민이었다. 그런데 일본에 병합되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독립할 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은 구주(歐洲)에서 국제연맹회의를 하고 있는 고로 이 좋은 기회에 독립하지 아니하면 안될 줄로 생각한다” 라고 대답하여 항일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당당하게 밝혔다. 그리고 법정에서 일본인 판사가 “피고는 조선 독립이 될 줄 믿고 있는가” 라고 묻자, 선생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거침없이 대답하여 민족 독립에의 확고한 신념을 분출하였다. 나아가 일본인 판사가 “피고는 금후에도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라고 묻자, 선생은 “금후 기회만 있으면 하겠다”고 답변함으로써 불요불굴(不搖不屈)의 독립정신을 드러냈다.

 

33대표의 소식(독립신문 1922년 3월 1일자) 민족대표33인의 근황을 알린 기사로 선생은 신석구, 홍병기 등과 함께 1921년 11월 5일에 만기 출옥한 것으로 되어 있다. 

 

선생은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감 이후에도 선생은 천도교의 교역자로 활동하면서 법정에서 밝힌 대로 재차 독립운동의 기회를 모색하다가 1927년 3월 24일 염원하던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자료제공 :

 

 

<3.1 독립운동 33인 대표 박준승 선생 기념사업>

임실군에서는 2001년 4월 '3.1운동 기미독립선언 민족대표 박준승선생 기념사업회'를 발족하고 2012년 8월에 생가복원공사를 착공, 2013년 7월 11일 상량식 및 현판식을 거쳐 10월 15일 임실군 청웅면 옥석리 주치마을 751-1 번지 일대에 총 사업비 8억4,600만원을 투자해 1,540㎡ 부지에 생가와 공중화장실, 만세광장 등이 조성됐다.

 

 

 

 

 

 

 

 

 

 

 

 

 

 

 

 

 

 

 

 

 

 

 

 

 

 

<정읍시 충무공원에 있는 박준승 선생 묘소>

 

자암 박준승선생의 묘비문( 菴 朴準承先生의 墓碑文)
偉大하도다.
公이시여, 靑史에 길이 빛날 抗日鬪爭과 革命精神은 온겨레에 民族精氣와 自主精神을 일깨워 주셨으며, 世界萬邦에 우리 民族의 優秀性을 宣揚하였도다.
公의 姓은 朴이요, 諱는 準承이요, 號는 菴이요, 本貫은 密陽이니, 高麗 文科司憲糾正太師 謚 武烈公 鉉의 二十一世孫이시며, 考通政大夫 諱 昊鎭, 淑夫人 焉川卜氏의 第三子로 檀紀 四一九九年 丙寅 十一月 二十四日 全羅北道 任實郡 靑雄面 南山里에서 誕生하시어 檀紀 四二四八年 井邑郡 山外面 平沙里에 移居하시었다.
公은 幼時로부터 天性이 穎悟하고 才藝가 出衆하여 愛國愛族하는 恩想이 堅固하시었다.
彌時에 國政이 解弛하여 國內에는 貧官汚吏의 橫暴가 恣行되고,國外로는 東蠻 西夷의 侵略이 甚重하여 民生이 토탄에 빠진지라 이에 慨歎한 公은 同志를 모아 大勢를 是正하려고 東學에 入道하여 檀紀 四二二七年 甲午에 革命을 일으켜 除暴救民 斥洋斥倭의 旗幟를 높이 들고 奮鬪하였으나 外國 軍隊의 介入으로 革命偉業은 중도에 挫折되었다.
그러나 公은 初志를 不屈하고 同志 糾合과 心身鍛鍊에 더욱 注力하여 檀紀 四二三七年 甲辰에 斷髮黑衣의 開化運動에 首接主로 活躍하셨으며, 全羅道 巡喩委員, 天道敎道師, 敬道師, 中央總部監事正 等의 敎職을 歷任하셨다.
檀紀 四二五二年 乙未 三月 一日, 擧族的 大義擧인 自主獨立運動 에 民族代表 三十三人中 一人으로 抗日運動을 領導하시다가 倭警에 被檢되어 西大門監獄어ㅔ서 二年間 獄苦를 겪으시던中 얻은 病으로 檀紀 四二五四年 辛酉 三月 二十三日 五十六歲를 一期로 怨死하시었다.
公의 墓所는 井邑郡 北面 馬亭里에 있었으나 場所가 狹小하고 環境이 不適하며 墓墳이 崩壞하고 草莎가 頹脫하여 空山落木 一 土 에 庸條荒凉한 慘狀은 目不忍見이었다,
이에 慨歎한 지방 人士의 發起로 公이 가신지 四十五年을 경과한 檀紀 四二九八年 乙巳 六月에 官民 一體의 渾然한 精誠으로 이곳을 澤하여 公의 遺骸를 社會葬의 禮式으로 安葬하고 墓碑를 竪立하여 公의 遺德을 追慕하는 바이다.
兄弟여, 姉妹여, 後世를 繼承할 靑少年들이여, 公의 遺骸를 吉地에 安葬하고 莊嚴한 墓碑를 建立한 誠意를 銘心하라.
그리고 公이 보여주신 崇高한 精神과 不屈의 實踐力을 繼承하여 國土統一을 이룩함으로써 國威를 萬邦에 宣揚하는 때에야 비로소 公의 榮光에 眞實로 慰安을 드리는 所以가 될 것이다. 以偈

 

<박준승 선생의 일대기>

 

o 1866. 11. 24 옥석리(주치마을) 756번지에서 박호진과 변 씨의 사이에 삼남으로 태 어남

o 본관 : 密陽(규종공파 중조 1세 鉉 字 22손). 호 : 泚菴

o 7세 때 서당공부 시작

o 10세 때 동료 가르치는 애기선생으로 불림

o 15세 때 선거리 시목동 원암 김영원 선생에게서 2년간 사숙(양한묵과 함께. 불의에 참지 못하는 성품)

o 17세 되던 해 남산리 홈다리마을로 이주

o 18(1883)세 때 장승화와 혼인

o 1886. 2. 28 부 사망. 3형제 분가 호주가 됨

o 1890. 4. 23 25세가 되던 해 동학교에 입교(김영원 선생의 입교소식 듣고 입교. 천 도교회 월보 199호)(시천주 신념관, 다시 개벽, 보국안민에 공감)

o 1894. 5. 7 임실 집강소 운영참여(전주화약 체결 후)

o 1897년 접주, 수접주가 됨

o 1902년 3월 都執에 임명됨(동학의 직업지도자)

o 1903년 이병춘과 전라남북도 책임(손병희 일본망명 후 박인호와 항일위한 포교에 신명 바침

o 1904년 8월 29일 청웅면 남산리 홈다리에서 수백 명을 모아놓고 진보회 개회(黑衣 斷髮 이기동, 최승우, 허선, 김영원, 조석걸 등)(허선, 윤세현 등과 48일간 옥살이)

o 1906년부터 사마제(삼화)소학교건립추진위원회 위원

- 설립자 : 운암면 최승우,

- 교 장 : 운암면 김영원

- 이 학교 출신들이 척왜운동에 주역이 되어 후에 폐교

o 1906년 임실 제2교구장(당시 구고면 향교리 성전마을)<천도교임실교사>

- 1908. 3월 제1교구(운암면 지천리 교구장 최승우)와 제2교구를 합쳐 구고리 양지 마을에 임실교구 설치 : 교구장 최승우)

- 1916. 4월에 청웅의 임실교구를 임실면 성가리로 옮김

o 1907년 泚菴 도호 받음

o 1908년(41세) 수접주가 됨(정읍·고창지구 천도교구 등 책임)

o 1909년 1월 천도교중앙총부 의사원

4월 연원조직의 도훈(500호의 교도를 지도하는 연원)

o 1912년 4월 우이동 봉황각에서 49일간 집단 수련(제1회 21명)

o 1913. 3. 17 장흥지방 천도교 중심세력 49일 연성지도(영암, 임실 등)

o 1914년 4월 2일 의암성사의 법문을 받음(74명)

o 1914년 7월 -1917 장성대교구장(산하에 8개교구 : 장흥, 담양, 광주, 곡성, 남평, 고창, 무장, 순창)

o 1915년 김승화와 결혼- 정읍시 산외면 정량리 이주

o 1916년 전라도 도사(전라도 최고지도자)(105일 기도 참여 권유)

o 1917년 10월 천도교 원로기구인 경도사 추대

o 1918년 도사실의 도사로 추대

o 1919년 2월 (권동진, 오세창의 권유로 손병희 승낙을 얻음)손병희 선생으로부터 독 립만세운동에 참여하라는 권유를 받음

2. 7 손병희 명령으로 8일 상경

2. 13 귀향 10여 명 교도를 임실교회에 집결 민족자결운동방침, 절차 주지

o 1919. 2. 25~27

- 독립선언서 5,000매 배부(유태흥·김의제·박영창 등으로 하여금 장성·남원·임 실 등지에서 궐기토록 조치)

- 손병희·권동진·오세창 등과 만나 독립운동에 관한 설명을 듣고 이에 적극 찬 동 민족대표로써 서명할 것을 승낙

o 1919. 2. 27 독립선언서의 초안 검토 민족대표로써 서명(최린·오세창·임예환· 권병덕·나인협·홍기조·김완규·나용환·홍병기·양한묵·김상규 등)

o 1919. 3. 1 오후 2시 민족대표 손병희 등과 함께 인사동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 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일본 경찰에 자진 검거됨(52세)(최린이 집주인에게 시켜 전화토록 함)

o 경찰에 검거된 뒤 박준승 선생은 철저하게 묵비권으로 심문에 응하여 재판기록은 항 상 백지가 될 수밖에 없었음.

o 1920. 10. 30 보안법 위반으로 2년형 선고받음

o 1921. 11. 5 만기출옥

o 1922년 중앙총부 감사직 종리사직 겸직

o 1925년 주간포덕사

o 1925. 8. 19 천도교분열 해결위해 통일기성회 고문으로 참여

o 1926년 1월 해월신사출세백년기념회위원(牙極眞理, 皆載此書)

o 1926년 4월 종법사(천도교 최고 예우직)

o 1927. 3. 23 사망(옥전출신 박영창<병간호>, 김재계, 신명희, 윤 치, 유태홍, 정상열 등이 장례위원)

o 유해

- 천도교장으로 정읍군 북면 마정리 먹방산에 묻힘

- 1963년 정읍군수와 지방 유지들이 협의 정주시 구미동 성황산 아래로 옮겨 봉안

o 1962. 3. 1 건국훈장 복장 추서

o 1963. 3. 1 임실 3·1동산독립기념비에 주벽으로 봉안

o 1994. 3. 4 청웅면 옥석리 783-1에 후손 박종래와 주치마을 주민들이 주치마을 회 관 오른쪽 공터에 유허비 건립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