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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시 사진,그리고../지구촌 풍경

스페인의 사그라다 빠밀리아

by 임실사랑 2009. 8. 20.

 스페인의 사그라다 빠밀리아(Sagrada Familia)

1882년에 건축하기 시작하여 100년 이상이 걸린 이 교회는 현재와 같은 속도로 진행된다면 앞으로도 100년 또는 200년은 더 걸려야 완성될 것이라고 한다. 이 성가족교회는 천재 건축가 가우디가 평생 동안 건축을 했고, 그가 죽은 뒤에도 계속해서 건축이 진행되고 있는 화제의 교회이다. 하늘을 향하여 치솟은 탑의 곡선도 볼 만하며, 탄생의 문 앞에 서 있는 예수탄생을 묘사한 조각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지하 예배당은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교회건축에 관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가우디의 묘도 이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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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딸라나(Catalana: 카탈루냐인)의 꿈 스페인의 사그라다 빠밀리아(Sagrada Familia) 

간단하게 흔히 사그라다 빠밀리아(Sagrada Familia, 파밀리아)로 불리는 엘 뗌쁠레 엑스삐아또리 데 라 사그라다 빠밀리아[EL Temple Expiatori de la Sagrada Famila: 성가(聖家)속죄교회, 까딸라(Catala: 카탈루냐어)가 공식표현]는 1882년 이후 스페인 동북부 까딸루냐(Cataluña, 카탈루냐)주의 주도 바르셀로나(Barcelona)시에 건축중인 거대한, 민간자본의 로마가톨릭교회이고 적어도 2026까지는 완공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유명한 까딸라나(Catalana) 건축가 안또니 가우디(Antoni Gaudi: 1852-1926, 안토니)의 걸작으로 여겨지는 이 교회는 그 거대한 규모와 독특한 디자인으로 여러 해 동안 바르셀로나의 관광명소의 하나가 되고 있다. 건물 내부의 일부는 2010년 예배와 관광객들을 위해 개방될 예정이다.

까딸루냐[Catalunya, 카탈루냐]의 역사

이베리아(Iberia)반도 지중해 연안의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까딸루냐는 로세스(Roses)지역 주변에 정착한 고대 그리스인들의 식민지였다. 그리스인들과 2차 카르타고[Punic, BC: 218-201, 포에니(Poeni)]전쟁 중에 이곳을 통치한 카르타고인들은 모두 이베리아 본토와 영향을 주고 받았다. 카르타고인이 패한 후 히스파니아(Hispania)의 나머지 지역과 함께 이곳도 로마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타라코[Tarraco, 따라고나(Tarragona)]는 이베리아반도의 주요 로마군 주둔지 중 한곳이 되었다.

로마의 멸망 후 400년간 이곳은 서고트족이 점령했고 8세기에 이곳은 무어의 알-안달루스(al-Andalus)의 지배하에 들었다. 732년 압둘 라만 알 가삐끼(Abdul Rahman Al Ghafiqi) 군대가 원정에서 패한 후 무슬림이 점령했거나 그들과 동맹을 맺었던 오늘날 까딸루냐 극북지역의 과거 서고트영토를 프랑크족이 점령했다. 샤를마뉴(Charlemagne, 742-818, 카롤루스)는 셉티마니아(Septimania: 현재 프랑스 남동부)지방 너머의 완충지역에 알 안달루스의 우마야드(Umayyad) 무어인들과 프랑크왕국 사이의 국경지역 역할을 한 마르까 이스빠니까(Marca Hispanica)로 알려진 개별적으로 통치된 별도의 소(petty)왕국들을 세웠다.

까딸루냐문화는 까딸루냐 극북지역의 수많은 소왕국들이 출몰하는 중세에 발전을 시작했다. 바르셀로나 백작들은 황제에 의해 지명된 프랑크족 봉신들로 프랑스 왕은 이들을 가신(801-987)으로 임명했다.

987년 바르셀로나 백작은 프랑스왕 위그 까뻬(Hugh Capet)를 인정하지 않았고 이것으로 그의 새로운 왕조는 효과적으로 프랑크족의 통치에서 벗어났다. 2년 후인 989년 까딸루냐는 독립을 선언했다. 1137년 라몬 베른게르 4세(Ramon Berenguer Ⅳ) 바로셀로나 백작은 아바르셀로나 주와 아라곤(Aragon) 왕국의 왕조동맹을 결성하기 위해 아라곤의 여왕 뻬트로닐라(Petronila)와 혼인하면서 아라곤제왕(Crown of Aragon)을 탄생시켰다.

1258년 코르빌(Corbeil)조약에 의해 프랑스왕은 라몬 베른게르 4세의 후계자 제임스 1세 왕에게 까딸루냐 공국의 영토에 대한 영주권을 공식적으로 양도했다. 이 조약은 통치권이 프랑스인들에서 아라곤인들로 넘어간 합법적인 이행으로 이 지역의 사실상의 독립을 가져왔다. 그것은 또한 역사적 조화문제를 해결했다. 아라곤제국의 일부로서 까딸루냐는 무역과 남쪽의 발렌시아(Valencia) 왕국, 동남해의 발레아레스(Baleares)제도 그리고 심지어 이태리 서남해의 사르디니아(Sardinia) 시실리(Sicily)의 정복을 통해 제국의 확장에 기여하며 해양권력으로 성장했다.

1410년 마르띤(Martin)1세가 후계자 없이 죽고, 까스페(Caspe)조약으로 뜨라스따마라(Trastamara)가문의 까스띠야(Castilla)왕조로부터 페르디난드(Ferdinand)를 받아들여 아라곤의 페르디난드1세 왕으로 삼았다.

그의 손자 아라곤의 페르디난드2세는 1469년 까스띠야의 이사벨라(Isabella)1세 여왕과 결혼했고, 소급적으로 이것은 스페인 왕국의 새벽으로 보였다. 당시에 까스띠야와 아라곤은 모두 별도의 영토로 남아 있었고, 각기 전통적인 제도, 의회, 법을 가지고 있었다. 정치권력은 아라곤에서 가스띠야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결국 까스띠야에서 스페인제국이 되었다.

확장된 기간에 과거 아라곤제국의 일부로서 까딸루냐는 자체의 관습과 법을 유지했지만 이것은 보다 중앙집권화된 영토를 가지려는 왕의 노력에 의해 봉건주의에서 근대국가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점차 사라졌다. 다음 몇 세기 동안 까딸루냐는 사신전쟁(1640-1652, 까딸루냐 반란)과 같이 스페인 권력의 중앙집중화의 안정에 기여했던 일련의 지역적 투쟁 속에서 패자에 속했다.

가장 중요한 투쟁은 1700년 짜를레스(Charles, 카를로스)2세가 후계자 없이 죽었을 때 시작된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이다. 까딸루냐는 중세 아라곤제국을 구성하던 다른 영토들과 마찬가지로 합스브르크 후계자 오스트리아의 짜를레스를 지지했고, 나머지 스페인지역은 프랑스 브르봉(Bourbon) 후계자 필립(Philip)5세를 지지했다. 1714년 9월 11일 바르셀로나가 함락된 이후, 과거 아라곤제국에 속하던 영토들의 “특별지위”와 그 제도들은 누에바 쁠란타(Nueva Planta)법에 의해 폐지되었고, 새로운 브르봉왕조의 중앙집권화된 정부로 스페인이 이행하면서 모든 지역이 스페인연방정부의 지방으로 합병되었다.

19세기 후반에 까딸루냐는 산업의 중심이 되었고, 오늘날에도 이곳은 스페인의 가장 산업화된 지역의 하나로 남아 있다. 20세기 초 까딸루냐는 스페인 제2공화국(1931)동안에 최초의 자치지위를 획득하며 여러 차례 다양한 수준의 자치지위를 획득하거나 상실했다. 이 시기는 스페인내전(1936-1939)동안 정치불안과 무정부주의자들이 득세한 것이 특징이다. 그들은 또한 1919년 세계에서 처음 8시간 노동을 성취하며 20세기 전반기 내내 활동했다. 프란시스코 프란코(Francisco Franco: 1892-1975, 프랑코)장군에게 권력을 가져다 준 스페인내전에서 공화국이 패한 후 그의 정권은 문제작을 출판하거나 공공장소에 토론하는 것과 같은 까딸루냐의 민족주의, 무정부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또는 공산주의완 관련된 모든 대중활동를 금지했다. 이런 조치의 일환으로 관공서와 공공행사에서 까딸루냐어의 사용을 금지했다. 프란코주의 정권의 후기에 까딸루냐어를 사용하는 어느 정도 민속적이고 종교적인 축제가 다시 시작되었고 묵인되었다. 대중매체에서 까딸루냐어의 사용은 금지되었지만 1950년대 초부터 극장에서는 허용되었다. 까딸루냐어로 된 출판은 그의 독재통치기 내내 지속되었다.

1975년 프란코가 죽고 스페인 민주헌법이 채택된 후 까딸루냐는 정치문화적인 자치를 회복했다. 오늘날, 까딸루냐는 스페인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역동적인 지역의 하나이다. 까딸루냐인의 수도이며 가장 큰 도시인 바르셀로나는 국제적 문화 중심지의 하나로 관광명소이다.

사그라다 빠밀리아

건축사

사그라다 빠밀리아는 원래 도시의 혁명사상이 만연해지는 데 대한 속죄 작품으로 까딸라나의 출판업자 호셉 보까벨라(Josep Bocabella)가 창안한 것으로 여겨진다. 건축가 프란쎄스 끄 데 빠울라 빌라르(Francesc de Paula Villar)의 설계도를 기초로 공공기금에 의해 1882년 시작된 건축은 전통적 신고딕양식의 단순한 교회를 계획했다.

보까벨라와 빌라르의 논쟁 이 후 안또니 가우디가 1884년 수석건축가로 취임했다. 가우디는 즉시 계획을 전면적으로 수정하여 그의 강한 종교적이고 민족적인 감정을 표현할 기회를 획득했다.

1911년 빠르끄 궬(Parc Guell, 구엘공원)의 공사를 마친 후 가우디는 세속적인 예술을 버리기로 하고 사그라다 빠밀리아에 남은 여생을 헌신하기로 했다.

사그라다 빠밀리아는 40년이 넘게 건축을 담당했던 안또니 가우디에 의해 설계되었다. 가우디는 교회건축에 마지막 15년의 삶을 바쳤다. 아주 긴 건축기간에 관하여 가우디는 “나의 고객은 서두르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한다. 1926년 가우디가 죽은 후 1936년 스페인 내전으로 공사가 중단될 때까지 Domènech Sugranyes의 감독하에 건축이 지속되었다. 미완의 교회 일부와 가우디의 모형과 작업장은 까딸라나 무정부주의자들에 의해 전쟁기간에 파괴되었다. 현재의 디자인은 사라진 계획안을 현대적으로 복원한 것에 기초한 것이다. 1940년 이후 Francesc Quintana, Isidre Puig Boada, Lluís Bonet i Gari 그리고 Francesc Cardoner 등의 건축가들이 공사를 진행했다. 현재의 감독이며 Lluís Bonet의 아들인 Jordi Bonet i Armengol은 1980년대 이후 설계와 건축과정에 컴퓨터를 도입하고 있다. 뉴질랜드의 마크 버리(Mark Burry)는 수석건축가와 감리를 맡고 있다. J. Busquets, Etsuro Sotoo와 논쟁이 되고 있는 호셉 수비라츠(Josep Subirachs)의 조각품들은 환상적인 외관들을 장식한다.

엘 뻬리오디꼬 데 까딸루냐(El Periódico de Catalunya, 까딸루냐 신문)지에 따르면, 스페인관광명소의 하나로 2004년에 226만 명이 이 특별하게 건축된 교회를 방문했다. 중랑(中廊: nave)의 둥근 천장은 2000년에 완성되었고, 그 후 주요 과제는 수랑(袖廊: 십자형 교회의 좌우 날개부분)의 둥근 천정과 후진(後陣: 동쪽 끝 내민 부분)의 건축이었다. 2006년부터 공사는 영광 파사드(Glory façade)가 될 중랑의 남쪽 면과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의 주탑을 가로질러 지지하는 구조에 집중되었다.

최근에, 스페인 공공사업부(Ministerio de Fomento)는 사원의 주요 파사드 바로 아래 건설될 스페인고속철도(Alta Velocidad Española, 알따 벨로시다드 에스빠놀라)용 터널공사를 계획했다. 비록 당국이 이 계획이 교회에 위험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사원의 기술자들과 건축가들은 터널이 건물의 안정성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어떤 보장도 없다며 우려하고 있다. 사원보존협회(Patronat de la Sagrada Família) 와 AVE pel Litoral 지역연합에 의한 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설계

사그라다 빠밀리아의 디자인 각 부분은 가우디가 “전기독교도의 마지막 대성당”이 될 교회를 꿈꿨던 만큼 기독교의 상징성이 풍부하다. 가장 두드러진 외관은 방추모양의 탑들이다. 총 18개의 커다란 탑들은 아래쪽의 12명의 사도들부터 높이가 높아질수록 4명의 복음서저자들, 동정녀 마리아 그리고 가장 높은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사원의 공식사이트의 2005년 “공사보고서”에 따르면, 시의 기록보관소에서 최근에 발견된 가우디의 서명이 있는 스케치들에서는 동정녀의 탑을 복음서 저자들의 탑 보다 낮게 하려던 가우디의 의도가 나타나 있고, 이것이 공사보고서들이 기존 기초와 보다 어울린다고 한 다음에 진행될 설계도 이다. 이 스케치들은 또 복음서 저자들을 통해 알려진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그 상징성을 보여준다.

복음서 저자들의 탑들에는 그들의 전통적인 상징 조각들인 황소(Luke, 루카, 누가), 날개가 있는 인간(Matthew, 마태오, 마태), 독수리(John, 요한), 그리고 사자(Mark, 마르코, 마가)가 올려질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중앙 탑에는 거대한 십자가가 올려지고, 가우디가 자신의 작품이 신의 그것을 초과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탑의 전체 높이는 몬쥬익(Montjuïc)언덕 보다 1m 낮은 170m이다. 보다 낮은 탑들에는 성만찬을 뜻하는 밀 다발로 이루어진 성찬과 포도송이들이 있는 성배가 올려질 것이다.

파사드(Façade, 정면, 외관)들

이 교회는 동쪽의 강탄, 남쪽의 영광, 서쪽의 수난으로 이루어진 웅장한 3개의 파사드를 갖출 것이다. 강탄 파사드는 1935년 공사가 중지되기 전에 건축되었고 가우디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열정 파사드는 매질을 당하거나 십자가에 매달린 수척한 그리스도상을 포함한 여의고 수척해진 고통 받고 있는 인물들이 특히 인상적이다. 이 논쟁이 되고 있는 작품들은 호셉 마리아 수비라츠(Josep Maria Subirachs)의 작품이다.

강탄(Naixement/Nativity) 파사드

가우디는 강탄 파사드에 종교적인 인물들 외에도 식물을 소재로 한 수많은 조각들을 배치하여 생명체의 풍요 속에서 다른 종교적 동기들을 연결해주도록 하는 인상적인 외관을 계획했다. 현관은 예수의 삶에 대한 독특한 표현과 함께 믿음(우측), 소망(좌측), 사랑(중앙)의 기독교 3덕을 표현한 3개의 입구들로 이루어져 있다. 각 입구의 아커볼트(archivolt, 홍예장식)은 꼭대기를 장식하고 있는 불빛까지 이어져 있다.

예수와 마리아 요셉과 천사들 상을 지지하는 기둥에 의해 두 개의 문으로 나뉘어져 있는 중앙의 사랑문은 왕들과 목자들의 예배를 표현하는 양쪽의 조각상들로 완성된다. 두 개의 오지브(ogive, 둥근 천장의 맞보)를 가진 커다란 창문이 팀파눔(tympanum, 팀판)을 이루고 원화창(圓華窓)에는 베들레헴의 별을 볼 수 있고 다윗의 별 위쪽에는 천사 가브리엘(Gabriel)이 동정녀에게 예수의 수태를 알리고 있다.

창문의 좌우의 천사 음악가들은 현관의 모든 면을 덮고 있으면서 거대한 외관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수 많은 종들의 꽃들로 이루어진 식물들과 동물들 그리고 새들로 둘러 쌓여 있다. 이 모든 조각들 위쪽의 황도 12궁의 모습은 그들이 예수의 탄생일 밤에 볼 수 있었던 모습들이다.

보다 위쪽 그리고 안쪽에는 새들이 주변에 조각되어 있고 동정녀의 대관식 모습이 있다. 그 위쪽의 꼭대기를 장식하고 있는 것은 순결을 상징하는 비둘기들이 앉아있는 사이프러스 나무이고 다른 장식적인 상징물들은 중앙의 두 탑 사이와 그 위쪽의 팀파눔 위에 올려져 있다.

좌측의 소망문은 중앙문 보다 작고 파사드 보다 덜 도출되어 있고 하나의 문이 있다. 이곳에는 이집트 피난 장면이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조각품들은 풍부한 수생식물들을 표현하고 있으며 헤롯(Herod)왕의 유아 대학살 장면도 있다. 대좌의 기초에는 수생 동물상과 거위들이다.

입구에는 아기예수와 성 요셉 상이 조각되어 있다. 예수의 외조부모 성자 요하힘(Joachim)과 성 안나(Anne)의 상도 있다. 불빛은 몬세랏(Montserrat)산을 표현한 첨탑을 장식하고 그 아래쪽에 동정녀와 성자 요셉의 결혼을 표현한 조각이 있다. 맨 끝에는 다면체 별 위에 면류관이 있다.

오른쪽의 믿음의 문은 소망의 문과 비슷한 크기이다. 가금류와 식물들 그리고 아라비아풍의 덩굴무늬 프리즈(frieze: 엔태블러처(entablature, 석조건축의 도리부분)의 가운데 부분, 띠 장식)이 조각된 대좌들을 볼 수 있다. 꼭대기와 오른쪽에는 각기 예수를 보기 위해 사원을 방문한 모습과 목공소에서 작업중인 예수상이다. 좌측에는 그의 성 사촌 이사벨(Isabel, 엘리자베스)을 방문한 동정녀이고, 보다 위쪽에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Zachariah)다. 그 위쪽의 벽감에 있는 것이 세례 요한 상이다. 정문의 상인방 위에서 입구를 관장하는 예수상은 12살의 모습이다. 팀판은 커다란 맞보와 원화창을 가지고 있다. 아커볼트(archivolt, 아치볼트, 아치 아래쪽의 장식적인 쇠시리나 띠)는 사과나무 가지들을 포함한 풍부한 식물들로 장식되어 있고, 좌측에는 다른 장식요소들 사이에서 천사들이 클라리온을 연주하고 있다.

요셉과 마리아가 경배하는 모습과 예수를 안고 있는 시므온(Simeon)상으로 이루어진 사원에 예수를 봉헌하는 모습 위쪽의 중앙에 보이는 불빛은 내부에 동정녀의 순결한 수태상이 있는 첨탑으로 마무리 되어 있다.

수난(Passió/Passion) 파사드

수난 파사드는 현재 건축 중인 지붕으로 덮인 회랑 위쪽의 코니스[cornice, 엔태블러처(entablature, 석조건축의 도리부분)의 맨 위 처마 띠돌림]를 지지하며 안쪽으로 기울어진 6개의 기둥들이 있다. 이 회랑의 지붕은 아래쪽 보다 더 기울어진 총 18개의 작은 기둥들이 지지하게 될 것이다. 이 주랑 현관도 다른 파사드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의 3덕을 상징하는 3개의 문이 수랑(袖廊)으로 연결될 것이다. 가운데 문은 조각가 수비라츠가 알파와 오메가를 함께 조각해 놓은 중간 문설주에 의해 둘로 나뉜다.

현관에는 모두가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극적으로 재현한 조각작품들이다. 이곳은 가우디의 계획과 다르게 필요한 섬세함을 갖추지 않았고 새 시대에 보다 어울리는 또 다른 접근법이 채택되었다. 가우디가 계획했던 외형은 획일적인 양식으로 배치되었고, 달리 말해 수비라츠는 S 형태로 수난사를 조각하는 새로운 개념을 발전시켰다.

조각품들은 S형태로 배치되어 왼쪽 문 아래쪽부터 우측으로 최후의 만찬, 유다의 키스(배신), 베드로의 부정, 이 사람(고통 당하는)을 보라(Ecce Homo), 예수의 재판 모습이고, 오른쪽 중간에서 왼쪽으로 예수무덤을 찾은 3명의 마리아, 골고다(Golgotha, Calvary)언덕, 로마 군인 롱기누스(Longinus)의 모습이고, 다시 왼쪽 위쪽에서 우측으로 예수의 옷을 걸고 주사위를 던지는 로마 군인들, 십자가에 못박인 예수, 예수의 안장 모습이다. 가운데 문의 앞쪽의 기둥에는 매질 당한 예수의 모습이다.

영광(Glòria/Glory)파사드

주랑 현관은 종탑 아래로 4개의 둥근 쌍곡면 천장과 총 20여 개의 둥근 천장이 있는 울퉁불퉁한 15개의 불빛들로 덮일 것이다. 이것은 21개의 기둥들이 지탱하게 될 것이다.

문은 각 측면 네이브[nave, 신랑(身廊), 중랑, 본당]에 하나씩 다섯 개와 다른 주랑 현관들과 마찬가지로 본 네이브에 3개의 중앙 문이 기독교의 3덕 믿음, 소망, 사랑을 위해 봉헌 될 것이다.

영광 파사드의 가장 극적인 요소는 불빛들 위쪽의 4개의 종탑에 설치될 구름 모양의 구조물로, 구름 위에는 사도신경의 라틴어

“Credo in unum Deum, 크레도 인 우눔 데움, 나는 유일신

Patrem omnipoténtem, 빠뜨렘 옴니뽀뗀뗌, 전능한 아버지 하느님

Factórem cæli et terræ, 팍또렘 찰리 에 타래, 하늘과 땅의 창조자를 믿는다”….

란 거대한 글자들이 쓰여질 것이다. 이 구름들은 신상을 둘러 쌀 것이다. 가우디는 바다에서도 영광 파사드를 볼 수 있기를 원했다.

라틴어 발음 참조: http://video.libero.it/app/play?id=de0f5b8b87d5f530e9803bc4c9f4305b

주랑 현관은 연옥의 상징인 프리즈[frieze, 엔태블러처의 코니스 아래부분, 소벽]을 조금 높게 그리고 사람들의 일상의 모습과 작품들을 다른 높이로 배치할 것이다. 초자연적인 구원은 구세주 주변의 성자들을 통해서 표현될 것이다. 위쪽 공간은 최후의 심판을 묘사하게 될 것이다.

현관들의 성호(聖號)는 중간에 예수와 성가(聖家) 그 위로 성령 그리고 아버지 하느님으로 보여질 것이다. 문들은 각기 성사(聖事)와 주기도문의 기원 중 하나에 봉헌될 것이다.

연단, 세례장과 성사예배당의 계단

파사드와 같은 폭인 기단의 계단 양쪽에는 독특한 기념물이 세워질 것이다. 세례장의 왼쪽과 앞쪽에는 20m 높이로 용출되는 4개 물기둥이 떨어져 집수통과 도수관들을 통해 다시 흘러내리게 될 거대한 분수가 설치될 것이다. 성사예배당의 다른 쪽과 앞쪽의 수많은 화로는 하늘에서 타오르는 불길을 본뜬 것이다.

영광 파사드 양쪽의 두 형제건물이 될 세례장과 성사예배당은 교회 뒤쪽의 성기실(聖器室)과 같아 보이지만 더 높다. 또한 이곳에는 수도원의 각진 작은 예배당들을 덮는 3개의 방첨탑과 불빛들이 설치될 것이다. 두 건물은 교회의 또 다른 내부 장식인 주랑 현관 쪽으로 바로 트여져 주랑 현관과 조화를 이루며 성기실로 접근할 수 있는 복도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실내 장식

성가족교회의 평면도는 5개의 측랑(側廊: aisle, 복도)을 가진 라틴 십자가형태가 특징이다. 가운데 네이브(nave)의 둥근 천장의 높이는 45m이고 측면 네이브의 높이는 30m이다. 수랑(袖廊, 십자형 교회의 좌우 날개)에는 3개의 측랑이 있다. 기둥들은 7.5m간격의 격자구조 이지만 빌라르(Villar)가 세운 기초 위에 세워진 후진(後陣: apse)의 기둥들은 격자에서 변화된 편자 형태를 이루고 있다. 거대한 쌍곡면을 지탱하는 4개의 반암기둥들에 의지하는 교차점은 현재 건축중인 12개의 쌍곡면들을 가진 2개의 고리들로 둘러싸여 있다. 중앙 둥근 천장의 높이는 60m이다. 후진은 75m에 이르는 쌍곡면 천장으로 덮일 것이다. 가우디는 정문에 선 방문자들이 네이브의 둥근 천장, 교차점과 후진을 볼 수 있게 하여 둥근 천장의 고상함이 점차 커지도록 하려고 했다.

내부의 기둥들은 독특한 가우디 디자인이다. 하중을 지탱하기 위한 갈래기둥 외에도, 끊임없이 변하는 표면은 다양한 기하학적인 형태가 교차된 결과이다. 간단한 예를 들자면 기둥이 올라가면서 4각형에서 8각형으로 변하고, 그 후 16면 형태가 되고 결국 하나의 원이 된다. 이런 효과는 나선형 기둥들의 3차원적인 교차로 인한 결과이다. 예를 들어 4각의 교차점의 한 기둥은 오른쪽으로 꼬아 돌고 다른 기둥은 왼쪽으로 꼬며 돈다.

기하학적인 섬세함

1930년경에 공사를 마친 강탄 파사드의 탑들은 입체파를 연상시키는 기하학적인 모양의 구조물들이 최상부를 덮고 있고, 복잡한 장식은 당시의 아르누보양식이지만, 가우디의 독특한 양식은 다른 예술가들이나 건축가들과 다르게 특징화를 반대하고 자연적인 것을 강조했다.

가우디는 사그라다 빠밀리아의 후기 디자인에 쌍곡선 구조를 사용했지만, 강탄 파사드의 일부 장소였다. 그 후 가우디의 선직면 디자인과 동일하지 않은 쌍곡선 디자인 등장했다. 상징의 하나가 담겨있는 바구니를 포함한 펠리컨 주변의 모든 경관이 그 사례이다. 사이프러스 나무는 다리로 연결하여 쌍곡면의 구조적 안정성을 보완했다. 그리고 마침내, “주교관” 첨탑들은 쌍곡선 구조물들로 덮여 있다. 그의 후기 디자인에서 선직면은 열정 파사드의 둥근 네이브 천장과 창문 그리고 외벽에 많이 나타나 있다.

상징

장식의 주제는 모두 기도서의 단어들을 포함하고 있다. 탑들은 “호산나(Hosanna: 하는님을 찬미하는 외침)", "하늘(Excelsis)", 그리고 "상투스(Sanctus: 거룩하다)”란 단어들로 장식되어 있고, 수난 파사드의 커다란 문들은 까딸루냐어를 포함한 다양한 언어들의 성경의 단어들을 재현했고, 영광 파사드는 사도신경(Apostles’Creed)의 단어들로 장식되어 있다. 신전지역들은 아마도 성자, 덕, 죄와 같은 다양한 개념들과 지역과 같은 세속적인 개념들에 어울리는 장식물과 같은 것으로 꾸며질 것이다.

매장

시실리의 콘스딴짜(Constanza: 1249-1302)

아라곤의 씨빌라 데 포르찌아(Sibila de Forcia) 여왕

안또니 가우디(1852-1926)

아라곤의 하이메(Jaime: 1267-1327)2세의 셋째 부인이고 사이프러스의 휴(Hugh)3세의 딸인 Marie de Lusignan

아라곤의 뻬뜨로닐라(Petronila: 1135-1174)

현재 상황

비록 완공 날짜가 지켜질지는 논쟁거리 이지만, 이 건축작업은 가우디의 죽음 100주기인 2026년경에 완성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현재의 담당 건축가는 교회의 복잡한 구조의 설계에 컴퓨터 모형을 사용한 마크 버리(Mark Burry)이다. 캐드/캠 기술은 건물의 건축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사용되어 왔고, 1900년 대 초기에 가능했던 건축기술에 기초한 건축공사는 처음에는 몇백 년 동안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건축공사는 독특한 모양으로 가공될 수 많은 돌들을 필요로 했고, 각 구조물은 다음 것과 미세한 차이가 있고 이런 조각들은 전체 건축시간을 단축하며 정확하게 반대쪽의 현재 구조물과 들어맞는다. 현재의 건축공법과 앞으로의 계획들에 대해 가장 잘 설명한 것은 Deutsches Architekturmuseum Frankfurt am Main에 전시하기 위한 목록 속에 있다.

이것은 가우디의 원래 디자인을 존중하며 건축에 반 평생을 바치고 있는 유명한 까딸루냐 건축가들의 시대정신이다. 이 문제에 책임 있는 후원자나 정치가들을 이 의견에 반대 한다. 이 교회는 2010년 9월에 예배를 위해 개방될 예정이다.

재정

사그라다 빠밀리아의 건축은 정부나 공식적인 교회의 후원에 의존하지 않는다. 개별 후원자들이 초기단계부터 자금을 지원했다. 관광객들이 구매하는 표는 건축을 위해 사용되고 개인의 기부는 사원의 벗(Friends of the Temple)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2009년의 건축예산은 1800(320억 원)만 유로다.

[출처] 까딸라나(Catalana: 카탈루냐인)의 꿈 스페인의 사그라다 빠밀리아(Sagrada Familia)|작성자 naho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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