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원역(전라도)
개설
고려시대 성종에서 문종 연간에역로(驛路)를 22역도(驛道)-525속역(屬驛) 체제로 정비할 때, 오원역(烏原驛)은 남원도(南原道) 임실(任實)에 위치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세종대와 세조대를 거치면서 전국의 역로가 41역도-543속역 체제로 정비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삼례도(參禮道)를 구성하는 역의 하나가 되었다. 그 뒤 조선후기까지 존속하였으나, 1896년(건양 1) 1월에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사(高麗史)』 참역(站驛) 조에 따르면 오원역은 남원도에 속한 12개소의 역 가운데 하나로, 고려시대부터 전라도 임실 지역에 설치되어 있었다. 정확한 설치 시기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고려의 역제(驛制)가 초기의 6과-147역 체제에서 22역도-525속역 체제로 정비된 995년(고려 성종 14)에서 1067년(고려 문종 21) 사이에 남원도에 소속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세종대에 전국적인 역도-역로 조직이 마련되면서삼례역(參禮驛)·반석역(半石驛)등과 함께 삼례도에 속하게 되었다.
조직 및 역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임실현 편에 따르면, 오원역에는 역마 10필과,역리(驛吏)75명, 역노(驛奴) 68명, 역비(驛婢) 37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변천
조선전기 세종 연간에 전국적인 역로 조직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세조대에는찰방(察訪)이 관할하는 역이 많고 또 역로가 멀어서 찰방이 순시하거나 사신이 왕래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그 결과 역로가 쇠퇴하는 등의 폐단이 나타났다. 그에 따라 1462년(세조 8)에는 각 도의 역참을 파하고 역로를 새롭게 정비했는데, 오원역은 그 과정에서 삼례도찰방 관할이 되었다(『세조실록』 8년 8월 5일). 그 뒤 조선후기까지 삼례도에 속한 역으로 존속하였다. 1896년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오원역의 위치는 『여지도서』·『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대동지지(大東地志)』 등에 모두 남원도호부 임실현 북쪽 20리 지점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조선총독부 중추원 역원 조사표」에는 임실현 북쪽 20리 지점인 임실군 오천면 선천리에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는데, 선천리는 1935년에 관촌리로 개칭되었다. 오늘날의 위치는 전라북도 임실군 관촌면 관촌리 일대이다. 관촌리는 오원역이 있었던 관계로 오원·역촌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여지도서(輿地圖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대동지지(大東地志)』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삼례도(參禮道)
조선시대에 전라도 전주의 삼례역을 중심으로 설치한 역도.
삼례역(參禮驛), 반석역(半石驛), 오원역(烏原驛), 갈담역(葛覃驛), 소안역(蘇安驛), 재곡역(才谷驛), 양재역(良才驛), 앵곡역(鶯谷驛), 거산역(居山驛), 천원역(川原驛), 영원역(瀛原驛), 부흥역(扶興驛), 내재역(內才驛), 단암역(丹嚴驛), 영신역(永申驛), 가신역(可申驛), 파청역(波淸驛), 양강역(陽江驛), 청송역(靑松驛)
개설
삼례도(參禮道)는 조선시대의 41역도(驛道) 중 하나로, 전남우도의 여산-장성, 전주-남원, 전주-순창, 함열-옥구, 함열-고부 등을 연결하는 역로를 관할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삼례도의 속역은 13개 역이었으며, 중심 역은 삼례역(參禮驛)이었다.
내용 및 특징
삼례도는 청암도(靑巖道)와 더불어 전라우도에 속한 역도로, 여산(礪山)-전주(全州)-금구(金溝)-태인(泰仁)-정읍(井邑)-장성(長城) 방면으로 이어지는 역로와, 전주-남원(南原), 전주-순창(淳昌), 함열(咸悅)-임피(臨陂)-옥구(沃溝), 함열-만경(萬頃)-부안(扶安)-고부(古阜)로 이어지는 역로를 관할하였다. 조선초기에는 역승(驛丞)이 소재하였으나, 세조대 이후 찰방(察訪)이 파견되어 역무를 관장하였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삼례도에는 삼례역을 비롯해 반석역(半石驛)·오원역(烏原驛)·갈담역(葛覃驛)·소안역(蘇安驛)·재곡역(才谷驛)·양재역(良才驛)·앵곡역(鶯谷驛)·거산역(居山驛)·천원역(川原驛)·영원역(瀛原驛)·부흥역(扶興驛)·내재역(內才驛) 등 13개 역이 소속되어 있었다. 그 중 삼례역·반석역·양재역·앵곡역 등은 중로(中路)에, 나머지는 소로(小路)에 해당하였다.
변천
삼례도는 조선시대에 들어서 성립되었지만, 이 역도의 연원은 고려의 역도 체제에서 비롯되었다. 삼례도는 고려시대의 22역도 중 전공주도(全公州道)·산남도(山南道)·남원도(南原道)에 속한 일부 역을 계승하여 조선 세종 때 성립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삼례도의 속역은 반석역·양재역·오원역·재곡역·소안역·옥포역(玉包驛) 등 6개 역이었다. 그 뒤 1457년(세조 3)에는 각 역의 관할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삼례도의 속역인 공산의 옥포역은 오수도(獒樹道)로, 임피의 소안역은 영보도(永保道)로 이속하였다. 그리고 삼례도의 나머지 속역 및 앵곡도(鶯谷道)·경양도(景陽道)의 모든 속역과, 청암도(靑嚴道)의 속역인 단암역(丹嚴驛)·영신역(永申驛)과, 영보도의 속역인 가신역(可申驛)·파청역(波淸驛)·양강역(陽江驛) 등을 삼례도로 편성하는 한편 역승을 혁파하고 정역찰방을 두었다.
1460년(세조 6)에는 영보도의 속역인 단암역과 청송역(靑松驛)을 삼례도로 이속하였다. 이어 1462년(세조 8)에는 각 도의 역참을 혁파하고 역로를 정비하면서, 삼례역·앵곡역·반석역·오원역·갈담역·소안역·촌곡역·양재역·거산역·천원역·영원역·부흥역·내재역 등 13개 역을 삼례도찰방의 관할 아래에 두었다. 1550년(명종 5)에는 삼례도가 극히 피폐하여, 삼관(三館) 즉 홍문관·예문관·교서관의 박사(博士) 이하 관원 중에서 명망 있는 사람을 뽑아 찰방을 겸직하도록 하였다.
순조 연간에 편찬된 『만기요람(萬機要覽)』에 따르면, 삼례도에는 반석역·앵곡역·양재역·거산역·천원역·갈담역·오원역·재곡역·소안역·내촌역·부흥역·영원역 등 12개 역이 소속되어 있었다. 삼례도는 이후 갑오개혁 때까지 존속하다가, 1896년(고종 33)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역참 제도가 폐지되면서 함께 철폐되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경국대전(經國大典)』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만기요람(萬機要覽)』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지도서(輿地圖書)』
『호남읍지(湖南邑誌)』
조병로, 『조선전기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오일순, 「고려시대 역제의 변동과 잡색역」,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0.
정요근, 「고려전기 역제의 정비와 22역도」, 『한국사론』45, 2001.
정요근, 「고려·조선초의 역로망과 역제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찰방(察訪)
조선시대 각 도의 역참(驛站)을 관리하던 종6품 외관직.
개설
조선시대의 교통 관원인 찰방(察訪)의 등장은 역제의 운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역제는 국가 운영에 필수적인 조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정비되었는데, 고려시대까지도 역의 운영은 역장(驛長)과 역리(驛吏)가 맡았고 정부에서는 가끔 관리를 파견하여 순시했다. 조선초기에는 찰방이 외방 사신의 기능을 포함한 다양한 기능을 수행했으나, 점차 교통 관원인 정역찰방(程驛察訪)으로 정리되어 『경국대전(經國大典)』 체제 이후에는 역참에 속한 역의 운영, 역리와 노비의 차정(差定) 및 관리, 관사 보수 등을 관할했다.
담당 직무
고려시대의 찰방사(察訪使)는 봉명사신(奉命使臣)으로서 백성의 어려움을 살피고 지방관들의 청탁(淸濁)을 규찰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런 점에서 초기 안찰사(按察使)의 기능과 유사하나, 안찰사가 봄가을에 정기적으로 파견되었음에 반해 찰방사는 필요할 때 간헐적으로 분견되었다.
조선시대에 찰방의 등장은 1401년(태종 1)에 처음 보인다. 당시 찰방의 역할은 태종의 신도(新都) 행차 때 백관(百官)과 만기(萬騎)가 화곡(禾穀)을 짓밟고 인심을 소요시키는 폐단을 금하는 것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정역찰방 기사는 1402년(태종 2) 2월에 사간원에서 건의한 시무 4개항 중에 처음 등장한다. 이때 파견된 정역찰방은 교통 전담 관원과 규찰 관원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였다.
정역찰방 제도가 정착된 이후에는 역정(驛政)의 최고 책임자로서 역리를 포함한 역민의 관리, 역마 보급, 사신 접대 등을 총괄하였다. 또한 북방 지역에서는 유사시에 합배(合排) 즉, 함경·평안도 연안에 설치한 군사적 성격의 역촌을 순행하면서 부방(赴防)의 임무도 수행하였다. 행정 측면에서는 대간(臺諫)이나 정랑직(正郎職)에 있는 문신을 차출해 지방 주현에 파견하여, 수령의 탐학과 민간의 질병까지도 상세히 고찰하게 하였다.
변천
고려시대에 언제부터 찰방사가 파견되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142년(고려 인종 20)에 찰방사 파견을 중지하고 수령 규찰을 안찰사에게 전담케 한 사실로 보아 고려전기부터 있어온 사행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안찰사가 주현(州縣)과 중앙을 잇는 중간 행정 기구로 정착하는 과정에서 수령 규찰에 한계를 드러내게 되었다. 특히 무신정변 이후 지방민의 봉기가 계속되자 1178년(고려 명종 8)에 이를 복구하고 이후 몇 년간 집중적으로 파견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1272년(고려 원종 13)에는 전국에 정역소복별감(程驛蘇復別監)을 파견하였다.
고려말에는 사회 혼란으로 인해 역제가 크게 문란해졌는데, 정부 관료들이 역을 개인적으로 많이 이용했고, 이로 인해 부담이 커진 역리들이 도망가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공양왕 때 조준(趙浚)의 건의로 역마다 6품관을 역승(驛丞)으로 임명하여 역을 관리하게 했다.
찰방사의 파견은 대체로 안찰사도와 감창사도(監倉使道)를 기준으로 행해졌는데, 고려말에는 여러 도를 겸하여 감찰하는 찰방사가 생겨나기도 하였다. 4품에서 6품에 이르는 관원이 주로 이에 임명되었다. 바로 이 찰방사가 조선초기에 정역찰방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찰방은 기능 면으로는 고려시대 지방의 역을 담당한 제도관(諸道官), 역순관(驛巡官), 제도관역사(諸道館驛使), 정역소복별감 등의 후신이지만, 명칭은 고려의 찰방사에서 기원한다.
1402년 2월에 사간원에서 건의한 시무 4개항 중에 “경기의 각 역에 모두 역승을 두어 그 직책을 행하게 하였고, 안찰사 대신 도관찰사(都觀察使)를 명하여 능부(能否)를 고찰하게 했으니, 정역찰방을 다시 보낼 필요가 없다.”는 내용이 보인다(『태종실록』 2년 2월 18일). 즉 1402년 이전에는 정역찰방이 파견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찰방은 후대의 찰방과는 달리 대체로 중앙의 낭관직(郎官職)에 해당하는 관원이 경관직을 지닌 채 임명되었다.
찰방의 종류도 역로(驛路)와 관련하여 파견된 정역찰방 외에 수군찰방(水軍察訪)·참로찰방(站路察訪)·해도찰방(海道察訪)·행궁찰방(行宮察訪)·수가찰방(隨駕察訪) 등 다양했다. 이 시기의 정역찰방은 역승을 혁파하고 대신 설치되기도 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역승이 설치되어 있는 곳에 찰방이 파견되어 역로를 순행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찰방은 역승과 달리 관찰사의 고찰 대상에서 제외되고 있었다.
세종조에 와서 찰방의 지위와 성격에 변화가 나타난다. 세종 중반기에 정역찰방에 대한 관찰사의 고적(考績) 문제와 구임(久任) 문제가 제기되면서 점차 찰방은 외관으로 바뀌게 되었다. 세종 후반기에 이르면 정역찰방이 완전히 외관으로 임명되면서 그 자질도 종전보다 떨어져 명망이 있는 조사(朝士)에서 성중거관자(成衆去官者)로 전락하고 있으며, 관찰사의 포폄 대상이 되면서 역로는 조잔해졌다.
1457년(세조 3) 7월에 최초로 역로의 소복책(蘇復策)으로 자질이 낮은 역승을 전면 혁파하고 찰방의 설치로 대체하였다(『세조실록』 3년 7월 17일). 이러한 조처는 서리거관자(書吏去官者)로 임명된 역승이 사사로이 이익을 도모하고 백성[吏民]을 침해할 뿐만 아니라, 역승의 관품이 높지 않다 하여 사신 왕래자의 작폐가 심하다고 거론되었기 때문이다. 1462년(세조 8) 1월에는 찰방이 관할하는 역이 많으므로 찰방도(察訪道)에 역승 1인을 더 설치하자는 논의가 나와 역로를 크게 개편하였다(『세조실록』 8년 1월 18일).
그에 따라 이해 8월 충청·전라도에 찰방과 역승 각 3명씩, 경상도에 찰방과 역승 각 5명씩, 강원도에 각 2명씩, 황해도에는 찰방 2명만 두기로 하였다. 『경국대전』에는 경기·충청·전라도에 찰방과 역승 각 3명씩, 경상도에 찰방 5명과 역승 6명, 강원도에 찰방과 역승 각 2명씩, 황해도에 찰방 2명과 역승 1명, 영안도에 찰방 3명, 평안도에 찰방 2명을 두는 것으로 법제화되었다.
1535년(중종 30)에는 역승이 완전히 폐지되고 찰방 체제로 전환되었다(『중종실록』 30년 6월 1일). 『속대전(續大典)』에서는 이미 역승을 혁파해 찰방으로 대치했으므로 찰방 수가 크게 늘어나 경기도에 6명, 충청도에 5명, 경상도에 11명, 전라도에 6명, 황해도에 3명, 강원도에 4명, 평안도에 2명이었다. 이 수는 조선말기까지 변함이 없었다.
조선중기 이후에는 겸찰방(兼察訪)을 파견하기도 했다. 일정한 지역 내의 도로와 역·원(院)의 관리와 감독을 위하여 종6품의 찰방직에 종7품 이하의 시종문신을 겸임하게 한 것이다. 『대전통편(大典通編)』에 경기도의 영서(迎曙)·양재(良才), 충청도의 성환(成歡), 경상도의 유곡(幽谷)·황산(黃山), 전라도의 삼례(參禮), 황해도의 금교(金郊), 강원도의 은계(銀溪), 함경도의 고산(高山), 평안도의 대동(大同)·어천(魚川) 등에 겸찰방을 둔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대전회통(大典會通)』에 의하면 경기도의 경안(慶安)에만 겸찰방을 파견하고 양재의 겸찰방은 폐지되었다. 이곳에는 왕의 측근 문신들이 겸찰방이라는 직함을 띠고 임시로 파견되어 감독과 규찰의 임무를 수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의의
찰방은 조선초기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면서 중앙집권화에 이바지하였으며, 북방 지역에서는 부방의 임무도 수행하였다. 행정 측면에서는 명망 있는 문신을 지방 주현에 파견하여 지방행정과 민정(民情)을 상세히 고찰하게 함으로써 민생 안정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경국대전(經國大典)』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김아네스, 「고려시대의 찰방사」, 『한국사연구』 82, 1993.
박홍갑, 「조선전기 찰방」, 『사학연구』 40, 1989.
임선빈, 「조선초기 외관제도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8.
역참(驛站)
조선시대에 왕명과 공문서의 전달, 사신 왕래에 따른 영송과 접대, 공공 물자의 운송, 통행인의 규찰 등을 위해 설치한 교통 기관.
개설
역참(驛站)은 사람과 물자를 운송하기 위해 설치한 공적인 교통 기관으로, 군사·외교뿐 아니라 행정 및 교통사적인 측면에서도 중앙 집권 국가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육상의 주요 교통로에는 역참을 설치하였고, 해상이나 강변에는 수역(水驛)이라고도 불리는 수참(水站)을 설치하여 수로와 육로를 연결하였다.
역참의 관리는 중앙의 경우 병조의 관할 아래 승여사(乘輿司)가 담당하였고, 지방의 경우에는 역승(驛丞) 또는 찰방(察訪)이 파견되어 속역을 관할하였다. 역의 실무는 역리(驛吏), 역노비, 일수(日守) 등 다양한 역속(驛屬)과 역호(驛戶)가 맡아보았는데, 신분을 세습하면서 역역(驛役)에 종사하였다. 이들은 그 대가로 공수전(公須田)·마위전(馬位田)·인위전(人位田) 등의 역전(驛田)을 지급받고, 이를 경작하여 제반 경비에 충당하였다. 또 역참에는 역의 크기에 따라 교통수단인 역마가 배치되었다.
그러나 과중한 역역, 역마가의 상승, 찰방에 의한 침탈 등으로 인해 역호가 조잔해지거나 도망함에 따라 점차 역참과 역로가 쇠퇴하게 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역로 소복책을 강구하게 되었고, 그 결과 하삼도 역민의 윤번 입역, 마호입역제(馬戶立役制), 역마고립제(驛馬雇立制) 등을 실시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역호의 입마역(立馬役)은 차츰 고립제로 변하였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는 역참제와 봉수제의 기능을 보완하기 위해 파발제(擺撥制)를 시행하여, 변경의 긴급한 군사 정보는 발참(撥站) 조직망을 통해 신속히 전달하게 되었다. 역참 제도는 갑오개혁을 계기로 전화·전신·우편 등 근대적인 통신 제도가 도입되면서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역참은 우역(郵驛)이라고도 하는데, 『경국대전주해(經國大典註解)』에 따르면 "걸어서 전달하는 것은 우(郵)이고, 말[馬]로써 전달하는 것은 역(驛)"이라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조선초기에는 중국 원나라 때의 잠치(站赤) 제도 및 명나라 때의 역체(驛遞) 제도의 영향을 받아 평안도에서는 관(館), 황해도·함길도에서는 참(站)이라고 불렀으나, 『경국대전』 체제에서 역(驛)으로 통일되었다. 그러나 관례대로 역관(驛館)·우역·역참 등의 용어가 통용되었다.
문헌 기록상 우리나라 최초의 역참은 신라 소지왕 때인 487년(신라 소지왕 9)에 설치된 우역으로, 역참은 고대 국가 체제가 성립된 삼국시대부터 정비되었다. 이후 고려시대에는 6과-22역도(驛道) 체제가 확립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세종과 세조대의 개편을 통해 41역도-543속역 체제로 발전하였다. 조선시대의 역참은 대부분 고려시대의 제도를 계승하면서 역의 신설과 이설, 통합을 거쳐 역도 및 역로망을 재편하고, 역승 및 찰방의 임명을 통한 관리 체계 수립, 역리 및 역노비 등 역속의 편성과 입역, 역마의 지급과 역전 경영을 통해 재정을 마련하였다. 역참에는 역사가 건립되었으며 중요 교통의 요충지에는 왕래인들에게 숙박과 편의를 제공하는 교통 취락 즉 역촌이 형성되었다.
조선시대의 역참은 1392년(태조 1) 7월, 태조의 즉위 교서에 나타난 바와 같이 전명(傳命), 즉 왕명을 전달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왕명 및 공문서의 전달은 중앙과 지방 사이에 정치 및 행정 체계를 공고히 하는 데 중요한 기능을 하였다. 그밖에도 역참은 진상품이나 공물의 운송, 봉명사신을 포함한 사객의 왕래에 따른 영송과 접대를 위한 역마 제공, 통행인의 규찰 및 국경을 지키는 관방(關防)의 역할까지 수행하였다.
조직 및 역할
조선시대에는 명나라의 척관법(尺貫法)에 따라 주척(周尺) 6척을 1보로, 360보를 1리로 삼아 10리마다 소후(小堠)를, 30리마다 대후(大堠)를 세우고, 약 30리마다 역을 설치하였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고려시대의 역로 조직을 계승하면서도 북방 지역에 위치한 역참의 몽고식 이름을 개편하였다. 또 역의 신설과 이설 및 통합 등을 통해 역도를 재편하였으며, 연변(沿邊)에는 합배(合排)라는 우역촌을 설치하였다. 또 중앙에는 병조 직속으로 승여사를 두어 역참 조직을 관리하게 하였으며, 지방에는 역승과 찰방을 파견하여 역참을 감독하게 하였다. 그 뒤 세종과 세조대의 대대적인 재편을 거쳐 『경국대전』 체제에서 41역도-543속역을 기반으로 하는 전국적인 역로망이 확립되었다.
역역을 담당한 역속 또는 역민은 조선시대 초기에는 사리(司吏)·역리·관군(館軍)·일수·역노비·서원(書員)·조역백성(助役百姓) 등으로 조직되었다. 사리는 1398년(태조 7)에 함경도 종성 지역에 위치한 역참의 몽고식 명칭을 개편하면서 신설한 역속으로, 뒤에 참리(站吏)로 개칭되었다. 역리는 역의 행정 실무를 맡은 아전이며, 관군은 평안도 지역의 의순관 같은 관역에서 역리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일수는 일수양반(日守兩班)이라고도 하는데, 1425년(세종 7)에 병조의 건의에 따라 각 역에 10명씩 배정되어 잡무를 맡아보았다. 전운노비와 급주노비로 구분되는 역노비는 마필 사육 등 잡역에 종사하였고, 서원은 문서의 발착을 맡은 서리이며, 조역백성은 역호의 부족으로 역리(驛吏)를 도와 사객(使客)의 접대와 기타 잡역 등을 담당하는 역인이다. 이후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면 역속은 역리와 역노비 외에도 지인(知印)·사령(使令)·통인(通引)·도장(導掌)·급주(急走)·구종(驅從)·마종(馬從)·보종(步從)·마호(馬戶)·서자(書者)·일수 등 좀 더 다양하게 분화되어 입역하였다.
그리고 각 역참에는 다음 <표1>에서 볼 수 있듯이 각종 역무를 수행하기 위한 근무 공간인 역사(驛舍)가 건립되어 있었다.

아사(衙舍)는 찰방이 집무하는 곳으로, 동헌과 내동헌으로 구분되었으며 기와집으로 건립되었다. 작청(作廳)은 성청(星廳), 질청(秩廳) 또는 인리청(人吏廳)이라고도 하는데, 역의 행정 업무를 실제로 담당한 역리들이 6방(六房) 분임에 따라 업무를 나누어 본 곳이다. 사령청(使令廳)은 사령들이 나팔·태평소·징·큰북 등을 보관, 관리하는 곳이고, 통인청(通引廳)에서는 통인이 통알(通謁), 인접(引接) 등의 업무를 수행하였다. 관노청(官奴廳)에서는 역노비 등 관노들이 잡무를 보았으며, 장청(將廳)에서는 장교들이, 서청(書廳)에서는 서자(書者)들이 각각 사무를 보았다. 또한 고마청(雇馬廳)은 역마를 고립하기 위해 징수한 신공전이나 복호가를 비축하는 창고이고, 진휼창(賑恤倉)은 역민들을 구제하기 위한 진휼곡이나 환곡을 저장, 관리한 창고를 말한다. 공고(工庫)는 역의 소요 비품을, 형지안고(形止案庫)는 역민의 호구 대장이나 토지 대장 등의 형지안(形止案)을 보관한 창고의 일종이다.
변천
조선후기에 일어난 역참제의 가장 큰 변화는, 임진왜란 이후 파발제를 시행함에 따라 역참의 역할이 일반 행정 문서의 전달로 한정되고 군사 정보의 전달은 파발이 담당하게 된 점이다. 파발 제도는 1597년(선조 30) 5월에 집의 한준겸(韓浚謙)이 명나라의 예에 의거해 파발을 설치하여 변경의 문서를 전달하게 할 것을 건의하면서 성립하게 되었다. 지역에 따라 서발(西撥)·북발(北撥)·남발(南撥) 등 3개 노선을 두었으며, 전송 수단에 따라 기발(騎撥)은 20리마다 참(站)을 두고, 보발(步撥)은 30리마다 참을 두었다. 그 결과 서발에 해당하는 한양에서 의주까지는 41개 참으로, 북발에 해당하는 한양에서 경흥까지는 64개 참으로, 남발에 해당하는 한양에서 동래까지는 31개 참으로 조직되었다.
두 번째로는 역리의 역할 분화와 입역 형태의 변화를 들 수 있다. 아전인 역리는 6방 분임에 따라 이방색·병방색·호방색·예방색·형방색·공방색·대동색 등으로 나뉘어 구체적인 업무를 맡았으며, 역리 인구의 증가와 입역 체계의 변화로 입역역리(立役驛吏)와 납공역리(納貢驛吏)로 분화되었다. 납공역리는 신공전을 납부함으로써 역역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평안도 지방의 관군도 마찬가지였다.
세 번째는 역마 확보 방법의 변화이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역리와 역노비 등 역호에 의한 입마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역호의 도망 등으로 인해 일반 평민을 마호로 편성하여 마호입마제를 시행하게 되었고, 대동법 시행 이후에는 일반 마상이나 민간으로부터 말을 사서 입대(立待)시키는 쇄마고립제와 함께 역마고립제를 시행하였다.
조선시대의 역참은 군사 통신상의 기능뿐 아니라 사신 영접 등 외교 측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나아가 역촌을 중심으로 지방 촌락이 형성되고 교통의 요지에는 지방 도시가 발달하게 되면서, 상품경제의 진전을 촉진하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역참은 갑오개혁을 계기로 1895년(고종 32)에 근대적인 교통 통신 제도가 도입됨에 따라 이듬해에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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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속록(大典續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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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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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로(驛路)
개설
조선시대에는 왕명과 공문서의 전달, 사신의 영송 및 접대, 관수 물자의 운송, 역마와 숙식의 제공 등을 목적으로 역참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역(驛)과 역 사이를 연결하여 사람과 물자가 이동하는 데 필요한 역로(驛路)를 조성하였다. 고려시대에는 개경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역도(驛道)-속역(屬驛) 체계를 확립하여 역로를 설치하였다. 그에 비해 조선시대에는 한양으로 천도한 뒤 한양을 중심으로 역로를 재편하여, 중앙 집권적 양반 사회를 지탱하는 동맥 역할을 하게 하였다. 역의 신설과 이설 및 통합을 추진했으며, 이식제(里息制)에 따라 6척(尺)을 1보(步), 360보를 1리(里), 30리를 1식(息)으로 정하여 역을 설치하는 규정으로 삼았다. 특히 4군 6진 설치와 서해안 및 남해안의 왜구 출몰, 명나라 및 일본과의 사대교린에 따른 사신 왕래 등으로 역로의 확대가 필요했으며, 그에 따라 역도를 개편하거나 신설하여 전국적인 역로망을 구축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 왕조는 기본적으로 고려시대의 역제(驛制)를 계승하였다. 그러나 한양 천도와 그에 따른 역의 신설과 이설 및 통합, 서북면과 동북면의 개척, 서해안과 남해안의 왜구 토벌, 군현의 행정 구역 개편 등으로 인해 역로를 새롭게 재편하였다.

그리하여 첫 번째로 한양 천도 이후 한양과 의주를 잇는 역로를 개편하였다. 그 중에서도 한양에서 개성에 이르는 영서(迎曙)·벽제(碧蹄)·마산(馬山)·동파(東坡)·청교(靑郊)·산예(狻猊)·중련역(中連驛)을 연결하는 영서도(迎曙道)를 가장 먼저 개편하였다. 이들 역은 고려시대 6과 체제에 속하지 않았으나, 조선시대에는 한양에서 의주에 이르는 대(對)중국 교통로이자 사행로로서의 역할이 매우 컸다. 그 결과 <표1>에서 보듯이 『대전속록(大典續錄)』에 대로역(大路驛)으로 분류되었다. 개경과 서경을 잇는 역로의 경우, 고려시대에는 6과 중에서도 1과에 편성되어 대로역에 해당하였으나, 조선시대에는 중로역(中路驛)으로, 평양에서 의주까지의 역들은 소로역(小路驛)으로 분류되었다.
의주 방면의 역로는 대중국 외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교통로였기 때문에 개편을 단행하였다. 평안도 지역의 역은 ‘관(館)’이라 고치고, 의주의순관(義順館)부터 중화의 생양관(生陽館)까지를 대동도(大同道)라 하여 관로역승(館路驛丞) 또는 찰방(察訪)을 파견하였다. 이곳에는 역리(驛吏)가 없었기 때문에 관군(館軍)을 뽑아 사신 접대를 맡겼다. 황해도의 경우 역을 ‘참(站)’이라 부르고, 황주의 경천참(敬天站)에서 금천의 금교참(金郊站)까지를 금교도(金郊道)로 삼아 참로찰방(站路察訪)을 임명하였다.
또 4군 개척에 따라 삭주·강계 방면의 역로를 새로 개설하였는데, 영변어천역(魚川驛)에서 삭주의 소삭역(小朔驛), 이산의 앙토역(央土驛), 만포의 만포역(滿浦驛)을 연결하는 어천도(魚川道)가 그것이다. 그밖에 고려시대의 주요 역로였던 서흥~황주간의 절령로(岊嶺路)가 쇠퇴하고, 그 대신 봉산의 동선역(洞仙驛)과 검수역(劒水驛)을 지나는 극성로(棘城路) 또는 황주로(黃州路)가 발달하였다. 이처럼 한양과 의주를 잇는 역로는 군사적인 측면보다는 사행을 위한 교통로로서 더 많이 활용되었다는 점을 특징으로 들 수 있다.
두 번째 역로상의 큰 변화는 한양과 동북 지방의 온성을 연결하는, 경기도 지역의 녹양역(綠楊驛)·안기역(安奇驛)·양문역(梁文驛)으로 편성된 평구도(平丘道)와 강원도 지역의 풍전역(豊田驛)·생창역(生昌驛)·창도역(昌道驛)·신안역(新安驛)·은계역(銀溪驛)이 소속된 은계도(銀溪道)를 신설한 점이다. 동북 지방의 역로는 군사 요충지인 함경도 지역을 도성인 한양과 연결하는 교통로이자 여진족이 왕래하는 길이었기 때문에 그 중요성이 컸다. 그에 따라 1398년(태조 7)에는 정도전을 동북면에 파견하여 군현을 새로 정비하면서 역참을 개편하였다. 홍원의 신은참(新恩站)·평포참(平浦站), 청주(靑州)의 오천참(五川站)·거산참(居山站), 단주(端州)의 시리참(施利站)·기원참(碁園站)·마곡참(麻谷站), 길주의 임명참(臨溟站)·약수참(藥水站)·명원참(明原站), 경성의 주촌참(朱村站)·오촌참(吾村站)·용성참(龍城站)·부가참(富家站), 경원의 시원참(時原站)·옹구참(翁口站)·강양참(江陽站) 등이 이때 개명되거나 신설되었다. 고려시대에는 개성의 산예역에서 동북방 선덕진의 선덕역(宣德驛)까지만 역로가 개설되어 있었으나, 조선시대에 와서 홍원의 신은참부터 경원의 강양참까지 역로가 확대된 것이다.
세종대에는 4군 6진의 설치를 계기로 북방 개척에 주력하여, 단천군에 곡구참(谷口站)을, 길주목에 웅평역(雄平驛)을 추가로 신설하였다. 또 1432년(세종 14)에는 영북진(寧北鎭) 등 6진의 설치를 계기로 이 지역의 진보(鎭堡)와 군현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경원의 마유참(馬乳站), 종성의 무안참(撫安站)·농교참(農郊站)·역산참(櫟山站)을 신설하였다.
1425년(세종 7) 5월에는 개성에서 철원에 이르는 도원(桃源)·구화(仇和)·백령(白嶺)·상수(湘水)·단금(丹金)·옥계(玉溪)·용담(龍潭) 등의 역을 신설하고, 양주에서 회양에 이르는 역의 합속(合屬)한 것이 대북방 역로 확대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풍천역(豊泉驛)과 전원역(田原驛)을 합하여 풍전역, 도창역(都昌驛)과 생안역(生安驛)을 합하여 생창역이라 하고, 금성현의 통도역(通道驛)과 웅창역(熊昌驛)은 창도역, 회양의 신양역(新揚驛)과 동안역(東安驛)은 신안역으로 통합함으로써 한양 천도 이후 동북 지방의 역로를 재정비하였다. 그리고 양주의 녹양역과 포천의 안기역, 영평의 양문역을 대로역으로, 철원의 풍전역을 비롯해 생창·직목(直木)·창도·신안·은계역과 함길도 온성의 덕명역(德明驛)을 중로역으로 분류하였다. 이 지역의 중요성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세 번째, 한양 도성에 역로를 개설하고, 하삼도 지역의 역로를 재편하였다. 한양에는 돈화문을 기점으로 서쪽으로 영서역(迎曙驛), 남쪽으로 청파역(靑坡驛)·양재역(良才驛), 동쪽으로 평구역(平丘驛), 북쪽으로는 노원역(蘆原驛)으로 연결되는 역로를 신설하였다. 또 고려시대의 광주도(廣州道)에 속한 역들을 부분적으로 계승하여, 한강 나루 건너 양재역-낙생역(樂生驛)-구흥역(駒興驛)-금령역(金嶺驛)-좌찬역(佐贊驛)-분행역(分行驛)-무극역(無極驛)을 지나 충주의 단월역(丹月驛)으로 연결되는 경안도(慶安道)를 확립하였다. 도성에서 충청도와 경상도로 이어지는 이 역로는 한양과 일본을 연결하는 직로(直路) 역할을 하였다.
또 도성을 방문하는 일본 사신의 수가 늘어나자, 상경로를 분산하기 위하여 1432년(세종 14)에는 부산포(富山浦)에서 상주·문경을 지나 연풍·괴산과 음성·음죽·이천·광주와 광진을 거치는 역로와, 제포(薺浦)에서 성주·옥천·청주·진천·죽산·용인·한강도 그리고 염포(鹽浦)에서 출발하여 안동과 영천·단양·충주·여흥·양근·평구역을 경유하는 노선을 확정하였다. 그 결과 양재도 외에 경안도, 평구도의 역로가 발달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역로 변화 중 마지막으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왜구를 막기 위해 서해안과 남해안에 설치한 진보와 수영 및 감영을 연결하는 군사적, 행정적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역참을 신설하고 역로를 재편한 점이다. 인천과 그 인근에는 경신역(慶信驛)·반유역(盤乳驛)·석곡역(石谷驛)·금륜역(金輪驛)·종생역(終生驛)·남산역(南山驛) 등을 신설하여 중림도(重林道)를 개편하였고, 서해안 충청 지역에는 풍전역(豊田驛)·세천역(世川驛)·용곡역(龍谷驛)·두곡역(豆谷驛)·신곡역(新谷驛) 등을 신설하여 금정도(金井道)·시흥도(時興道)·이인도(利仁道) 등의 역도를 재편하였다. 또한 남해안 지역에는 남해의 덕신역(德新驛), 거제의 오양역(烏壤驛), 해남의 남리역(南利驛) 등을 다시 설치하여, 남해안 방어를 위한 역로로서 그 기능을 수행하게 하였다.
변천
조선시대의 역로 개편에서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고려시대의 22역도-525속역 체제가 41역도-543속역 체제로 분화된 점과, 15세기 이후 군현의 통폐합에 따른 역의 이설 및 통합 등을 들 수 있다. 무주현의 소천역(所川驛), 수원의 청호역(菁好驛) 외에 양산의 위천역(渭川驛)을 덕산역(德山驛)으로, 밀양의 양동역(良洞驛)을 용가역(龍駕驛)으로 이설한 경우가 여기에 해당된다. 또 평안도, 함길도의 압록강~두만강 연안에 임시로 설치된 강계(江界)에서 개천(价川)의 9개 합배(合排)와 여연(閭延)에서 운산(雲山)까지의 27개 합배가 설치되었다. 역의 잡무를 돕게 하기 위해 함길도·평안도의 군사적 요지에 특별히 마련되었던 합배는 점차 역참으로 개편되었다. 또 역로를 교통로로서의 중요도에 따라 대로·중로·소로로 나누고 그에 따라 역전(驛田) 및 역속(驛屬)에 차이를 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호남 지방의 경우 나주목과 광주목, 순천도호부나 장흥도호부와 강진 병마절도사영,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영, 전라우도 수군절도사영을 연결하는 간선 교통로의 발달에 따라 역로를 재편하였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영산강 서쪽 방면을 중시한 데 비해, 조선시대에는 왜구를 막기 위해 서해안과 남해안을 중심으로 역을 신설하고 역로를 확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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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도(驛道)
개설
역도(驛道)는 도로의 상태와 중요도 및 산천의 거리에 따라 여러 개의 역을 묶어, 관역사나 정역별감, 역승, 찰방 등의 관원으로 하여금 관리하게 한 역로를 말한다. 조선의 역도는 기본적으로 고려의 6과(科)-22역도 체계를 계승하였다. 그러나 4군 6진을 개척하고, 경기도 및 하삼도 지역의 역을 신설·이설 및 통합하면서 태종, 세종, 세조대에 걸쳐 대대적으로 역도를 개편하였다. 그 결과 『경국대전(經國大典)』을 반포할 무렵에는 41역도-543속역 체제가 확립되었다. 조선 왕조는 이처럼 전국적인 역참 체계를 조직하고, 각 역도에 역승(驛丞)과 찰방(察訪)을 파견해 왕명의 전달, 역마의 입마(立馬), 사신의 접대, 통행인의 규찰, 역민의 확보 등의 임무를 수행하게 함으로써 중앙 집권적인 통치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의 역도는 고려시대의 역도 체계를 바탕으로 부분적인 개편을 거치면서 점차 확립되었다. 1413년(태종 13) 9월에 서북면의 생양관(生陽館)에서 의순관(義順館)까지 역승을 임명하고, 금교참(金郊站)에서 경천참(敬天站)까지는 관승(館丞)을 임명하여, 그들의 관리 아래 역을 운영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 달에는 경기도의 역도인 마산도(馬山道)를 청파도(靑坡道), 금곡도(金谷道)를 중림도(重林道), 풍해도칠참(豊海道七站)을 동선보산도(洞仙寶山道)로 개편하고 그와 동시에 청교도(靑郊道)를 증설했는데, 이것이 조선시대 역도 개편의 시초인 것으로 보인다. 이듬해인 1414년(태종 14)에는 평구도(平丘道)를 복설하였으며, 1415년(태종 15) 4월에는 풍해도구참(豊海道九站)에 관승 1명을 더 두어 금교경천도관승(金郊敬天道館丞)이라 하였다.
그 후 1423년(세종5) 7월에는 경상도의 황산도(黃山道)·성현도(省峴道)를 설치하고 역승을 파견하였으며 태조 이후 세종대에 걸쳐 동북 지방의 개척에 따라 새로운 역을 설치함으로써 함길도의 역로 조직도 새롭게 편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평안도의 관로는 관승 대신 찰방을 차견하고, 역도를 평안도(平安道) 생양관로찰방(生陽館路察訪)과 평안도(平安道) 신안관로찰방(新安館路察訪)으로 이원화시키고 경기도는 영서역(迎曙驛)에서 산예역(狻猊驛)까지를 경기우도정역찰방(京畿右道程驛察訪)으로, 양재역(良才驛)에서 무극역(無極驛)까지 경기좌도충청도정역찰방(京畿左道忠淸道程驛察訪)으로 개편하였다. 그리고 동북 지방의 함길도는 6진 개척을 계기로 태조 이후 신설한 역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역도 체제를 확립하였다.
그리하여 1421년(세종3) 6월 함길도관찰사 신상(申商)의 요구에 의하여 기존의 고산도(高山道)와 시리도(施利道)를 고산도(高山道)·시리도( 施利道)·주천도(酒泉道)라는 3개의 역도로 편성되었다. 그 후 영북진(寧北鎭)을 설치한 것을 계기로 6진 개척이 거의 완성된 1440년(세종22) 2월에는 의정부의 주장으로 안변의 고산참(高山站)에서 함흥의 덕산참(德山站)까지를 고산도(高山道), 홍원의 신은참(新恩站)에서 길주의 고참(古站)까지를 거산도(居山道), 경성의 명원참(明原站)에서 경원의 마유참(馬乳站)까지를 수성도(輸城道)라 하여 역도 조직을 개편하고 찰방의 주관 아래 운영토록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3도 찰방 체제는 다시 5도 역승 체제로 바뀌었다. 1445년(세종 27) 3월에는 고산도(高山道: 안변 고산참~고원 통달참), 화원도(和原道: 영흥 화원참~홍원 평포참), 거산도(居山道: 북청 오천참~단천 마곡참), 명원도(明原道: 길주 영동참~경성 수성참), 연기도(燕基道: 온성 무녕참~부령 회수참)의 5개 역도로 일시 개편되었다가 다시 1446년(세종28) 12월에는 고산도(高山道: 안변 고산참~함흥 덕산참), 거산도(居山道: 홍원 함원참~갑산단천 마곡참), 명원도(明原道: 길주 영동참~경성 수성참), 풍산도(豊山道: 회령 석보참~오진 부거참)의 4개 역도 체제로 바뀌었다.
이처럼 세종대에는 역로를 전국적으로 조직하여 44역도-537속역 체계를 확립하였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 <표1>과 같다.


이와 같은 세종대의 역도 체계는 그 뒤 세조대에 이르러 또다시 대폭 개편되었다. 세조 연간의 개편은 1457년(세조 3)과 1460년(세조 6), 그리고 1462년(세조 8) 세 차례에 걸쳐 단행되었다. 먼저 1457년 9월에는 도성 인근에 위치한 경기도의 여러 역과 강원도 및 충청도의 일부 역을 합속하여 경기좌도·경기우도·경기충청좌도·경기충청우도·경기충청도·경기강원도 등 6개 역도로 나누고, 역승을 폐지하고 그 대신 각각 정역찰방(程驛察訪)을 두었다. 그밖에 충청도·경상도·전라도·황해도의 경우 일부 역과 역도를 다음 <표2>와 같이 기존의 역도에 통합하는 방향으로 개편하였다.

그러나 이 역도 체계는 오래 존속하지 못하고, 1460년 2월의 2차 개편과 1462년 8월의 3차 개편을 거쳐 다음 <표3>과 같이 확립되었다. 다만 2차와 3차 개편은 단순히 역을 이속(移屬)하고 역도를 통합한 것이 아니라, 사객과 찰방이 먼 거리를 왕래하는 데 따른 인마(人馬)의 폐단을 줄이기 위해 각 역과 역도의 거리를 조정하여 재편성하였다.

1462년에 개편된 역도 체계는 이후 일부를 제외하고는 다음 <표4>와 같이 『경국대전』 체제의 41역도-543속역 체계로 확립되었다. 이로써 마침내 조선시대 전기의 전국적인 역로망이 완성된 것이다.



이상과 같은 조선시대 역도 체계의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는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함에 따라 한양을 중심으로 전국의 역도 체계를 재편한 점, 둘째로는 4군 6진 등의 영토 확장에 따라 역참과 합배를 신설하고, 4군 지역에는 대동도(大同道)·어천도(魚川道)를, 6진 지역에는 고산도(高山道)·거산도(居山道)·수성도(輸城道)를 신설한 점을 꼽을 수 있다. 셋째로는 개성 도원역(桃源驛)에서 철원 용담역(龍潭驛)에 이르는 도원도(桃源道)를 신설한 점, 넷째로는 고려시대의 22역도-525속역 체계를 41역도-543속역으로 개편하여 지역별로 역도를 분할하고 속역을 신설한 점을 들 수 있다. 마지막 다섯째로는 중요 교통로를 따라 대로·중로·소로로 역도를 구분하고, 파발로나 봉수로와의 보완 관계를 유지하면서 교통·군사·통신을 통합적으로 운영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변천
조선시대 전기의 41역도-543속역 체계는 일부 속역의 치폐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조선시대 후기까지 유지되었다. 그리하여 갑오개혁으로 역참제가 폐지되고 근대적인 교통 제도가 발달하기 전까지, 역도는 중앙 집권적 양반 관료 사회를 지탱하는 교통 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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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국대전(經國大典)』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지도서(輿地圖書)』
『대동지지(大東地志)』
『만기요람(萬機要覽)』
『호남역지(湖南驛誌)』
『영남역지(嶺南驛誌)』
『관서역지(關西驛誌)』
『관북역사례(關北驛事例)』
정요근, 『고려, 조선초의 驛路網과 驛制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조병로, 『한국근세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유선호, 「조선초기의 驛路와 直路」, 『역사교육』70, 1999.
정요근, 「조선초기 驛路網의 전국적 재편-교통로의 측면을 중심으로-」, 『조선시대사학보』46, 2008.
역리(驛吏)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역참에서 제반 업무를 담당한 아전.
내용과 특징
역리(驛吏)는 왕명이나 문서를 전달하는 ‘전명(傳命)’이라는 역(役)을 담당한 역민(驛民)의 하나로, 지방 이서층(吏胥層)에 해당하였다. 이들은 지역에 따라 달리 불렸는데, 하삼도에서는 역리라 하였고, 평안도 지방에서는 관군(館軍), 황해도 및 함경도에서는 참리(站吏)라고 불렀다. 조선시대 대다수의 역리는 고려의 역정호(驛丁戶) 또는 역리가 존속 또는 계승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여말선초의 사회 변동기에 새 왕조의 정책을 반대한 무관이나 원악향리(元惡鄕吏)를 역리로 귀속시키기도 하였다. 또 사화(士禍)로 화를 입거나 죄를 지은 사족 가운데 일부가 역리로 정속(定屬)되는 경우도 있었다.
역리는 역리 호적에 오른 역호(驛戶)로서 대대로 세습되었다. 1424년(세종 6) 7월에 경기좌도 정역찰방(程驛察訪)의 건의에 따라, 소속된 역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성명과 나이, 사조(四祖)와 외조(外祖) 및 처의 성명·나이, 솔정(率丁) 등을 기재하여 역리 호적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를 병조와 감영, 군현 및 본역에 보관하고, 3년마다 도망자와 사망자, 입역 대상자 등을 파악하여 역리를 확보하도록 하였다.
역리의 임무는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로는 왕의 명령인 전명 및 공문서의 전달과, 감사를 포함한 수령의 교체에 따른 영송 및 접대를 들 수 있다. 둘째, 왕명을 전달하는 사신 및 외국을 왕래하는 사신들의 짐[卜物]과 각종 진상품을 운반하는 일을 맡아보았다. 셋째, 공용 역마를 길러 바치는 일을 담당하였다. 역리들은 지급받은 마위전(馬位田)을 경작하여 거기서 얻은 재원으로 말을 사육해 입대시켰는데, 말 값이 오를 경우에는 가산을 탕진하는 등 큰 어려움을 겪었다. 조정에서 목장마를 나눠 주거나 향리를 조역(助役)으로 차정하는 조역정책(助役政策)을 실시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넷째, 변방의 요충지에 위치한 역에서는 군사 임무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왜구의 출몰이 잦았던 삼척옥원역(沃原驛)의 경우, 1412년(태종 12) 12월에 근처에 있는 용화역(龍化驛)의 역리까지 방어에 동원됐다. 역리는 잡색군에 편성될 뿐만 아니라 부방군(赴防軍)에도 충군되었다. 함경도수성역(輸城驛)의 경우, 역리와 역졸(驛卒)을 작대(作隊) 즉 부대로 편성하여 수령의 친병(親兵)으로 삼기도 하였다.
이처럼 역리는 많은 일을 담당하였는데, 특히 역역(驛役)과 군역의 이중고로 인해 유이(流移), 도산(逃散)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1473년(성종 4)에 병조는 역리를 군역에 차출하는 것을 반대하였고, 다양한 역로 소복책과 역리 부성책을 강구하였다. 당시에 제시된 역리 부성책은 ① 각 도의 역리를 잡색군에 충원하지 말 것, ② 역리 또는 역녀와 혼인한 공천(公賤) 소생은 역에 소속시켜 입마하게 할 것, ③ 역리와 일수(日守)의 잡역을 면제할 것, ④ 역리와 동거하는 매부나 사위 중 자원하는 자를 역에 소속시켜 입마하게 할 것, ⑤ 조역인은 한역(閑役)한 사람으로 충당할 것, ⑥ 양전(量田)할 때 군자에 속한 잉여 마위전을 역에 환급할 것, ⑦ 도망한 역리는 장 100대에 처하고 도망 역리를 숨겨 준 자는 양인일 경우 잔역리(殘驛吏)로 충원하고, 노비[公私賤口]일 경우 장 100대를 치고 중노동 형벌[徒刑]을 3년간 부과할 것, ⑧ 관찰사가 도망한 역리나 쇄환(刷還)된 역리를 철저히 점검할 것 등이었다(『성종실록』4년 5월 10일).
조선후기에 이르러 역리의 입마역은 마호입마제(馬戶立馬制), 역마고립제(驛馬雇立制)로 점차 대체되었고, 실무 행정의 분화와 더불어 입역 형태도 변화되었다. 진주 소촌역(召村驛)의 경우, 이른바 6방분임(六房分任)에 따라 역리가 이방색(吏房色), 병방색(兵房色), 호방색(戶房色), 예방색(禮房色) 등으로 구분되어 실무를 나누어 담당하였다. 일반적으로 이방은 본·외역의 역리와 역졸로부터 신공전을 수납하고, 신관과 구관의 영송 및 관청에 필요한 물품을 진배(進排)하는 일을 맡아보았다. 호방은 공수전을 관리해 쌀과 콩을 거두고 역민으로부터 역에 필요한 물품을 징수했으며, 마위전·복호전을 관리하는 일을 주관하였다. 또 예방은 삭전(朔錢)과 수요품의 조달을, 병방은 역참에 필요한 도구를 구입하는 비용과 왕래하는 사객의 인마기세(人馬騎貰) 및 복세전(卜貰錢)을 마련하는 일, 왕이 능행할 때 역마를 입대하는 일과 마적(馬籍)을 관리하는 일 등을 맡았다. 대동색과 관청색은 본역대기(本驛垈基)에서 콩을 징수하여 역마를 기르고 대동고(大同庫)를 관리하며, 찰방의 월급과 성정미(詳定米)의 대전(代錢)을 수납하는 일을 맡았다. 그리고 형방은 각종 문부(文簿)를 수보(修報)하는 일을, 승발(承發)은 문첩(文牒)을 수보하며 전관(傳關) 등을 담당하였다.
역리는 대체로 양인(良人) 신분이었으며, 과거나 군공(軍功)을 통해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다. 또한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이들에게는 장전(長田) 2결과 부장전(副長田) 1결 50부씩이 역리위전(驛吏位田) 등으로 지급되었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역리를 부역이나 조세를 면제해 주는 복호(復戶)로 인정하기도 하였다.
한편 조선후기에는 역리의 수가 늘어나고 역역이 분화되면서, 이신응역(以身應役)하는 입역역리(立役驛吏)와 신공전(身貢錢)을 납부하는 납공역리(納貢驛吏)로 나뉘어 교대로 근무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산거(散居)하여 일반 평민들처럼 잡역에 종사하게 되었다. 특히 16세기 이후부터는 국가 기강이 해이해지면서 역리가 도망하는 경우가 잦아졌고, 관노비가 역리로 신분을 상승시키는 역노승리법(驛奴陞吏法)의 시행 및 양인의 사천화(私賤化), 역리의 노비 전락 등의 신분 변동이 일어났다. 심지어는 공천(公賤)·사천(私賤)을 역리로 충원함으로써 역리와 역졸 간의 신분 혼동마저 초래되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경국대전(經國大典)』
『속대전(續大典)』
『대전통편(大典通編)』
『대전회통(大典會通)』
『연조귀감(掾曹龜鑑)』
『연조귀감속편(掾曹龜鑑續編)』
『호남역지(湖南驛誌)』
『관서역지(關西驛誌)』
『만기요람(萬機要覽)』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반계수록(磻溪隨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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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졸(驛卒)
역참(驛站)에 배속되어 군사 정보나 왕명의 전달, 공물의 운반 등과 같은 임무를 수행한 역노비.
개설
역졸(驛卒)은 역(驛)에서 각종 노역을 제공한 공천(公賤) 즉 역노비를 가리킨다. 고려대부터 존재한 것으로 보이나, 고려초기에는 그 기록을 찾아볼 수 없고 고려말에 역의 폐단과 관련된 기록에서 자주 언급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건국 초기의 사회 변동 과정에서 역호(驛戶)가 조잔해지고 유망(流亡)하게 되면서 역졸이 부족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신왕조를 개창한 건국 세력은 역제를 정비하면서 역졸을 충원하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납가속량(納價贖良), 도산(逃散) 및 모록투탁(冒錄投託), 역노승리법(驛奴陞吏法) 등의 실시로 종량화(從良化)의 길이 열리게 되었고, 그 결과 역졸 간에 신분이 뒤섞이는 현상도 발생했다.
담당 직무
역졸은 사신 행차에 따른 복물(卜物)의 운송, 공문서의 전달, 입마역(立馬役), 이노작대법(吏奴作隊法)에 따른 군역 등 다양한 일을 수행하였다. 그 중 복물의 운송은 전운노비(轉運奴婢)가, 공문서의 전달은 급주노비(急走奴婢)가 각각 담당하였다.
역졸의 가장 중요하고도 힘든 업무는 말을 사육해 입대(立待)시키거나 말 값을 내는 일, 즉 입마역(立馬役)이었다. 1516년(중종 11)에 능성현령송세림(宋世琳)은 "역졸이 마위전(馬位田)을 지급받아 입마를 담당하고 있으나, 입마역이 역졸들의 생활을 매우 고통스럽게 하여 도산하는 자가 많으므로 우전(郵傳)이 날로 피폐해지고 있다."는 상소를 올렸다(『중종실록』11년 7월 15일).
조선전기에 역졸은 주로 신역을 통해 입마역을 수행하였으나, 조선후기에 이르면 말 값을 쌀이나 베, 돈으로 납부하는 납전역으로 바뀌었다.
역졸은 그밖에도 사신 행차에 따른 복물(卜物)의 운송과 공문서의 전달도 담당하였는데, 복물의 운송은 전운노비(轉運奴婢)가, 공문서의 전달은 급주노비(急走奴婢)가 각각 담당하였다. 그뿐 아니라 각 고을의 구실아치와 노비 등으로 군대를 편성하게 한 이노작대법(吏奴作隊法)에 따라 수령의 수하친병(手下親兵)으로 조직되어 군역까지 부담하였다. 이처럼 역졸은 힘든 일들을 많이 담당해야 했기 때문에 도망하거나 역을 회피하는 경우가 많았다.
변천
역졸에 관한 기록은 고려초기에는 보이지 않으며 고려말 사회 변동의 혼란 속에서 역호의 조잔과 유망과 관련된 기록이 나온다. 이로 볼 때 역졸은 고려후기에 성립한 것으로 보인다. 역졸은 역역(力役)에 따라 전운노비와 급주노비로 나눌 수 있다. 전운노비는 혁거사사노비(革去寺社奴婢)에서 비롯되었는데, 역에서 사신의 복물이나 진상, 공부(貢賦) 등의 관수품을 운반하는 일을 하였다. 이에 비해 급주노비는 각력(脚力)을 이용하여 문서를 전송하는 일을 맡았다.
『조선왕조실록』에 보이는 역졸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1420년(세종 2)에는 역졸의 자식이나 공사 노비의 자식들이 도첩제를 어기고 승려가 되고 있다는 기사이다『세종실록』 2년 11월 7일 3번째기사]. 또 6진 개척 이후인 1433년(세종 15) 사민 정책을 실시하였던 세종은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의 향리, 역졸, 공천, 사천 중 희망자를 이 지역으로 이주시켜 신역의 면제와 토관직 제수 등의 혜택을 줄 것을 검토한 기록도 나타난다(『세종실록』 15년 11월 19일).
그러나 급주노비와 전운노비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 각각 『태조실록』과 『태종실록』에 나오는 것으로 볼 때, 역졸은 조선 건국 당시부터 이미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역졸은 역(驛)에 매인 공노비로, 신분과 신역이 세습되었다. 그러나 양란 이후 조선후기에 이르면 양민의 인구 감소와 노비 인구의 증가 현상이 나타나면서 양역에 종사해야 할 인구의 확보 문제가 대두하였다. 그 결과 천인종량화(賤人從良化)의 길이 열려 역졸도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었다. 역졸은 재물을 바치고 신분을 바꾸는 허속(許贖), 세도가를 등에 업고 신분을 바꾸는 모칭양인(冒稱良人), 혹은 관노비를 역리로 신분 상승시키는 역노승리법(驛奴陞吏法)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양인이 되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급주노비에게는 입역에 대한 대가로 3정을 1호로 편성하여 1호마다 한전(閑田)과 다량의 토지를 점한 사람의 진황전(陳荒田) 50복(卜)씩을 구분전(口分田)의 명목으로 지급하였다(『세종실록』 6년 3월 25일). 그러나 토지의 소유권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 경작권만을 지급한 것이었다. 이외에도 전운노비에게는 목장전(牧場田)과 군자전(軍資田)이 지급되었다.
그러나 1445년(세종 27) 국용전(國用田)의 설치와 함께 구분전이 혁파되자 직역전(職役田)으로 바뀌어 전운노비의 구분전은 폐지된 것으로 보이며, 급주노비의 구분전은 급주전의 형태로 유지되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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