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암집 제2권 / 시(詩)○칠언절구보유(七言絶句補遺)
오원역 도중에 호남 관찰사로 있을 때 〔烏原驛道中 湖南方伯時〕
푸른 버들 붉은 꽃이 핀 따스한 삼월 / 柳綠花紅三月暄
정기와 절월이 내와 벌판을 덮었네 / 旌旗節鉞蔽川原
금화로 고하며 삼세가 영광스러우니 / 金花誥又榮三世
개미 같은 이 몸이 천지 은혜 어찌 갚나 / 螻蟻那酬天地恩
[주-D001] 오원역(烏原驛) : 전북 임실군에 있는 역명(驛名)이다.
[주-D002] 절월(節鉞) : 안찰사가 가지고 가는 부절(符節)이란 깃발과 부월(斧鉞)이란 도끼이다. 부월은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을 상징한다.
[주-D003] 금화(金花) : 촉금화(燭金花)를 말한다. 촉금화는 당(唐)나라의 영호도(令狐綯), 송(宋)나라의 왕흠약(王欽若)ㆍ소식(蘇軾) 등이 한림학사(翰林學士) 시절에 천자로부터 받았던 하사품이다. 이로써 문학지사(文學之士)가 임금으로부터 최상의 대우를 받는 명예로움을 의미하게 되었다.
유희춘(柳希春)(1513~1577)
조선 중종(中宗)~선조(宣祖) 때의 문신ㆍ학자. 본관은 선산(善山). 유계린(柳桂隣)의 아들이며 김안국(金安國)ㆍ최산두(崔山斗)의 문인(門人). 이조 참판 등을 지내고, 경사(經史)와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미암일기(眉巖日記)》등 많은 저술을 남김.
| 시대분류 : | 한국>조선전기 |
| 지역분류 : | 전라도>해남 |
| 유형분류 : | 인명>문사>학자ㅣ인명>관인>문신 |
| 자(字) | 인중(仁仲)【補】 『미암집(眉巖集)』 附錄卷20, [시장(諡狀)]을 참고하여 자를 추가. “公姓柳氏. 諱希春. 字仁仲. 善山府人也. 其先本出文化.”라고 기록되어 있음. |
| 호(號) | 미암(眉巖)【補】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 106]) 내의 급제 기록을 참고하여 호를 추가. |
| 시호(諡號) | 문절(文節)【補】 「『인조실록』 28권, 인조 11년(1633) 1월 26일」 기사를 참고하여 시호를 추가. “副提學柳希春諡文節”이라고 기록되어 있음. |
| 생년 | 계유(癸酉)【補】 1513년 (중종 8) 『미암집(眉巖集)』 附錄卷20, [시장(諡狀)]을 참고하여 생년을 추가. “公以正德八年癸酉十二月初四日. 生於海南縣居第.”라고 기록되어 있음. |
| 졸년 | 정축(丁丑)【補 「『선조실록』 11권, 선조 10년(1577) 5월 15일」 졸기 기사를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
| 본인본관 | 선산(善山)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 106]) 내의 급제 기록을 참고하여 본관을 선산(善山)으로 추가. |
| 거주지 | 해남(海南) 「『선조수정실록』 11권, 선조 10년(1577) 5월 1일」 졸기 기사를 참고하여 거주지를 추가. “希春世居海南縣”이라고 기록되어 있음. |
[이력사항]
선발인원 : 100명 [一等5‧二等25‧三等70]
타과 : 중종(中宗) 33년(1538) 무술(戊戌) 별시(別試) 문과(文科) 3등(三等) 6위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유계린(柳桂隣)【補】『미암집(眉巖集)』 附錄卷20, [시장(諡狀)]을 참고하여 부를 추가. “考諱桂隣. 贈吏曹參判.”이라고 나옴.
[처부(妻父)] 성명 : 송준(宋駿)[生]【補】『미암집(眉巖集)』 附錄卷20, [시장(諡狀)]을 참고하여 처부를 추가. “公配宋氏. 洪州著姓. 司憲府監察駿之女. 封貞敬夫人.”이라고 나옴.
본관 : 홍주(洪州)【補】
[안항(鴈行)] 형(兄) : 유성춘(柳成春)[生]【補】『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 106]) 내의 급제 기록을 참고하여 안항을 추가.
개설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인중(仁仲), 호는 미암(眉巖). 해남 출신. 유양수(柳陽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공준(柳公濬)이다. 아버지는 유계린(柳桂鄰)이며, 어머니는 사간 최보(崔溥)의 딸이다. 처부(妻父)는 송준(宋駿)이며, 김인후(金麟厚)와는 사돈간이다. 김안국(金安國)·최두산(崔斗山)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38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44년(중종 39) 사가독서(賜暇讀書)주 01)한 뒤 수찬·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1546년(명종 1) 을사사화 때 김광준(金光準)·임백령(林百齡)이 윤임(尹任) 일파 제거에 협조를 요청했으나 호응하지 않았다.
1547년양재역(良才驛)의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곧 함경도 종성에 안치되었다. 그 곳에서 19년간을 보내면서 독서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이 때 국경 지방의 풍속에 글을 아는 사람이 적었는데, 교육을 베풀어 글을 배우는 선비가 많아졌다 한다.
1565년충청도 은진에 이배되었다가, 1567년선조가 즉위하자 삼정승의 상소로 석방되었다. 직강·응교·교리 등을 거쳐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했으며, 이어 장령·집의·사인·전한·대사성·부제학·전라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1575년(선조 8) 예조·공조의 참판을 거쳐 이조참판을 지내다가 사직해 낙향하였다.
경전에 널리 통했고 제자(諸子)와 역사에도 능하였다. 시강원설서 재임 시에 세자(후의 인종)의 학문을 도왔고, 선조 초에는 경연관으로 경사(經史)를 강론하였다.
왕위에 오르기 전에 유희춘에게 배웠던 선조는 항상 “내가 공부를 하게 된 것은 희춘에게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하였다 한다. 만년에는 왕명으로 경서(經書)의 구결언해(口訣諺解)에 참여해 『대학』을 완성하고, 『논어』를 주해하다가 마치지 못한 채 죽었다.
성격이 소탈해 집안 살림을 할 줄 몰랐으나, 사람들과 세상 이야기나 학문, 정치하는 도리에 대한 투철한 소견과 해박한 지식은 남들이 도저히 생각하지 못한 것들이었다고 한다.
외할아버지 최보(崔溥)의 학통을 계승해 이항(李恒)·김인후 등과 함께 호남 지방의 학풍 조성에 기여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담양의 의암서원(義巖書院), 무장의 충현사(忠賢祠), 종성의 종산서원(鍾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미암일기』·『속몽구(續蒙求)』·『역대요록(歷代要錄)』·『속휘변(續諱辨)』·『천해록(川海錄)』·『헌근록(獻芹錄)』·『주자어류전해(朱子語類箋解)』·『시서석의(詩書釋義)』·『완심도(玩心圖)』 등이 있으며, 편서로 『국조유선록(國朝儒先錄)』이 있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참고문헌
주석 : 주01: 문흥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 전념하도록 휴가를 주던 제도
집필자 : 집필 (1997년) 이수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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