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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향 임실/임실군 자료

임실성당

by 임실사랑 2012. 1. 31.

전북 임실군 임실읍 이도리 590번지에 자리잡고 있는 임실 성당은 554명의 신자를 구성원으로 1956년 9월 6일 설립되었다. 그간 임실성당은 지역사회에 봉사하는 교회로 발전하면서 내실을 다지는데 노력해 왔다. 농촌이라는 특성을 고려하여 신자들 뿐 아니라 지역민들의 의식개발과 소득향상에 기여해 왔으며, 도시화의 물결 속에서도 꾸준히 교세를 늘리며 발전해 왔다. 그러나 농촌 인구가 계속 감소하면서 1993년을 기점으로 신자수가 줄고 있다. 그렇지만 교회만의 교회라는 틀을 과감히 벗어 던지고, 그간 해왔던 것처럼 농촌 살리기 운동등 지역사회와 호흡을 같이 하는 교회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 줄 것으로 기대된다.

  2000년 2월 현재 임실 성당에는 신평(신평면 호암리)·신전(관촌면 신전리)·성수(성수면 성수리)·삼길(신덕면 삼길리)·강진(강진면 갈담리)·관촌(관촌면 관촌리) 등 6개 공소에 332세대 763명의 신자가 있고, 군청 소재지가 있는 임실읍에는 186세대 405명의 신자가 있어 모두 1,168명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성당에는 신부님 한 분과 수녀님 두 분이 상주하고 있다.

 

 

 

임실성당의 역사

임실 성당은 제 3대 전주교구장 김현배주교의 1군 1본당주의 실천에 따라 1956년 임실읍 성가리에 소재한 속칭 '소나무집'이라는 작은 집 한 채를 매수하여 임시 성당을 마련한 데서 비롯된다. 그해 9월 6일 남원 성당에서 분리되어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관할구역은 임실군 전지역 곧 임실읍, 관촌면, 덕치면, 삼계면, 성수면, 지사면, 둔남면, 신덕면, 신평면, 청우면, 강진면, 운암면 등과 남원군 일부(덕과면, 사매면) 그리고 장수군 일부(산서면)를 일원으로 하는 지역이었다.

  초대 주임에 이상화 신부가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상화 신부는 고령에다 노환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전주교구청 당가(현재는 관리국장)인 김이환 신부가 초대 주임을 겸임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57년 새로 서품된 김치삼신부가 그해 4월 30일 보좌신부로 임명되어 본다에 상주했으나 얼마 되지 않아 군종으로 입대하게 되었다. 그해 8월 26일 김후생 신부가 제 2대 주임신부로 임명되었다.

  김후생 신부는 오래 전부터 건강이 좋지 못하였으나, 부임 후 덕치(덕치면 회문리)와 물우리 공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1958년 8월 29일 임실읍 이도리에 성당 부지를 매입하고 기공식을 가졌다. 전주교구청으로부터 시멘트 1,000포를 지원받은데 힘입어 초대 회장인 황봉수 씨와 김종태 씨 등 본당 신자 그리고 신전·두실·성수·공소 신자 200여명이 합심하여 노력봉사를 하는 등 성전 건립에 힘을 모았다. 1959년 5월 10일, 성당(129평)·사제관(67평)·수녀원(9평)을 준공하였고, 그해 5월 14일 김현배 주교의 집전으로 낙성식 및 봉헌식을 갖게 되었다. 한편 성당을 신축하던 시기에 구호물자(480양곡)를 지원받아 가난한 지역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 결과 청웅면 소재지, 덕치면 물우리·사곡리·가곡리·천담리, 신평면 소재지 등에 신자가 생기게 되었고, 신자 수가 증가하였다.

임실성당의 발전과 지역사회에 봉사하는 교회

  1961년 1월 11일 성전 신축에 전력을 다하다 건강이 악화된 김후생 신부가 휴양하게 되고, 임시 주임신부 대리에 벨기에 출신으로 한국 선교사로 나온 지정환 신부가 임명되었다. 이때 인보성체 수도회 수녀 2명이 부임했다.   그러나 지 신부는 얼마 되지 않아 전동 성당 보좌로 전임되고 , 박성운 신부가 1961년 4월 13일 제 3대 주임신부로 임명되었다. 박신부는 본당 내에 강당을 신축하고, 강진면 소재지로 700여평의 부지를 매입하여 강당을 신축하였을 뿐 아니라, 성수 공소의 강당도 신축하였다. 또한 덕치면 사곡리, 관촌면 회봉리, 성수면 성수리의 산을 구입하고 개간 사업을 벌여 지역의 어려운 주민들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주었다.
  1964년 6월 10일 박성운 신부는 함열 성당으로 전임되고 제4대 주임에 지정환 신부가 임명되었다. 교회의 적극적인 사회 참여를 주장해 온지 신부는 산간 지대의 어려운 농촌 현실을 인식하고 신자들 뿐 아니라 농민들의 소득 향상, 나아가 농민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방편으로 유산양 사육을 장려하였다. 산양 사육 농가가 증가하자 임실군 임실읍 성가리에 대지 200평을 구입하여 건평 7평의 흙벽돌 건물로 양유처리 시험 공장를 건립하여다. 그리고 유산양 사육농가 10가구를 중심으로 임실 산양 협동조합을 설립하였으며, 1968년 6월 20일에는 총건평 39.6평의 새공장을 건립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치츠를 생산하게 되었다. 이 치즈 공장은 한국에서는 최초로 시작되었고, 여기에서 나온 치즈는 서울의 유수한 호텔과 백화점 등로 공급되어 지역민들의 소득향상에 일조하였다. 1980년 치즈 공장을 신용협동조합에 이양하여 완전히 지역주민들에 의해서 운영하도록 했다. 또한 1967년 12월 31일에 설립된 임실 신용협동조합 역시 교회의 적극적인 노력에 힘입어 설립되었다. 이처럼 일실 본당은 지역민의 소득향상을 위해 노력하면서 지역사회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지정환 신부가 1969년 12월 31일 농촌사목 전담신부로 전임되고, 제 5대 주임에 서석기 신부가 임명되었다. 서 신부는 어린이 놀이터를 개설 개방하여 놀이 공간을 마련하였고, 1972년에 부임한 제6대 김진소 신부는 임실 성당 주보인 '길'을 발간하여 신자들의 신심앙양과 열린 교회로 나가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 당시는 유신체제로 모든 사회 활동이 통제를 받던 시기였다. 김진소 신부는 신학생 시절 부정부패 추방을 위한 시위를 주도한 경력이 있었고, 당시 전주교구는 유신체제에 정면으로 저항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보기관의 감시를 받기도 하였다. 1973년 8월 17일 김진소 신부가 전임되고, 우이으로 김반석 신부가 제 8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이 시기에 수녀원이 철수하게 되는데, 이것은 정부의 공업화 우선 정책에 따라 도시화 현상이 급격히 증대되고 이농현상이 심각하게 대두되면서 신자 수가 격감되어 본다 재정 형편이 어렵게 되자 어쩔수 없이 이루어진 일이었다.

   제 9대 박중신 신부를 거쳐 제 10대 전대복 신부가 1976년 12월 7일 부임하여 임실본당에서는 처음으로 초등학생들을 위한 주일학교를 운영하게 되었고, 중.고 학생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당시 신태근, 전자석 씨 등을 중심으로 농민화가 조직되어 의식 개발 교육 및 기도회등이 임실 성당에서 개최되었다. 또한 1979년에는 '노풍피해 보상운동'을 전개하여 보상을 받는 등 농민의 권익옹호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1980년 1월 5일 제 11대 왕수해 신부가 임명되어 삼길 공소 강당을 신축하고 성서 교육을 위해 '베델성서'를 실시하였다. 또 임실 치즈 공장을 신용협동조합에 이양하여 완전히 지역 주민들에 의해서 운영되도록 하였다.

  1981년 1월 20일 제 12대 주임으로 임명된 조정오 신부는 신심 단체인 레지오 마리에 창설에 노력하면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관촌 공소 성당을 신축하였고, 골수암으로 진단을 받았으나 치료비가 없어 사경을 헤매던 여학생을 위해 굥회를 통해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그러나 병의 악화로 끝내 사망하자, 그 동안 모아 온 성금을 모두 유족들에게 전달하여 온정의 손길을 나누었다. 1974년 5월 10일 제 13대 박종근 신부가 임명되었다. 박신부는 오수 공소 강당을 신축하고 성당 지붕 및 사제관 지붕 보수공사를 마쳤으며, 1985년에는 '소값 보상을 위한 기도회'등을 개최하여 농민의 권익투쟁에 적극 나섰다. 또한 공소의 주일학교 운영가 평신도들의 단체 결성을 적극 후원하여 신앙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데 노력하였다. 제 14대 박인호(1987. 5. 14) 신부 때에는 수녀원을 새로 지어 수녀들을 모시게 되었다. 또한 농민의 권익보호에 앞장서 '고추 전량 수매를 위한 단식', 농민시위와 관련해 실추된 임실군민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였다. 제 15대 김기수(1990.5.7) 신부 때에는 성당의 전기시설과 개보수 작업등을 새롭게 했으며, 오수.관촌, 강진 공소 등에 신심단체를 결성하였다. 제 16대 전종복(1994.1.29)신부를 거쳐 현재 박종탁(1994.9.3) 신부가 사목하고 있다.

  제 16대 전종복 신부를 거쳐 제17대 박종탁(마태오 1994.9.3)신부때에는 6개 공소의 전기장판 시설과 도배 및 개보수 작업등을 새롭게 했으며 울뜨레야...레지오를 활성화 하였다.  제 18대 정천봉(베네딕도) 신부 때에는 본당의 지붕보수 및 교육관(30평)을 신축하였으며 ('99.4~7월) 담장 및 대문공사를 완료하였고,  현재 유종환(마태오 2000.1.29임명) 신부가 사목하고 잇다.

 

임실군의 초기 천주교

현재 임실 성당에 관할하고 있는 임실군 전역에 천주교 신도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정확한 시기나 신앙공동체가 형성된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사목방문 보고서가 작성되기 시작한 1882년에 , 이 지역에서 여러 공소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음이 분명하다.

한국 천주교회가 일정한 양식으로 된 교세 통계표를 작성하기 시작한 것은 188년부터이다. 일정한 지역 교회를 담당한 신부는 매년 봄, 가을 2회에 걸쳐 신도들이 집단으로 살고 있는 교우촌을 방문하여 신앙을 지도하고 성사를 집전했는데, 이때 교우들은 고해성사를 보게 된다. 이것을 판공이라 불렀다. 그리고 신부는 판공 결과를 교구 본부에 보고하였다. 그 기간은 전년 부활후부터 당해년 부활전까지의 1년간이다.

  전라도 지역을 담당한 리우빌 신부가 1882년 작성한 교세 통계표에 의하면 임실 지역에는 거뜸이(운암면 청운리) 공소가 임ㅆ다. 신도 수가 얼마나 되느지 기록에 나오지 않으나 다음해인 1883년 통계표를 보면 75명의 신도가 있었다. 당시 다른 지역의 공소들을 보면 10명이 넘는 경우도 있긴 하나, 평균 30-40명의 숫자로 볼 때 결코 적지 않은 교우수이다.

  그렇다고 그 때부터 천주교 신도들이 이곳에 살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1882년부터 신부의 공식적인 방문이 있었다는 것을 뜻할 뿐이다. 기록상으로 거뜸이는 임실군 관내에서 처음으로 나오는 천주교 신도들의 교우촌이다. 이들이 어떻게 하여 이곳에 교우촌을 형성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 수 가 없다. 그러나 이웃하고 있는 순창과 정읍 그리고 완주군 지역에 일찍이 천주교 신자들이 거주했음을 볼 때, 박해를 피해 안전지대를 찾아 온 신자들이 공동체를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1885년 대명리(오수면 대명리)공소가 나오고, 거뜸이와 가까운 박실(운암면 운종리)은 1888년에 나온다. 그후 마시동(1895,덕치면 회문산 밑), 방골(1897년, 관촌면 방수리)등의 공소가 있었다.

  1898년 회경동(신덕면 조월리)과 신전리(관촌면 신전리)에 공소사가 설립되었다. 신전리는 완주군 소양면과 산 하나르 사잉에 두고 있다. 소양은 오래 전부터 천주교인들이 거주했던 지역이다. 이곳에서는 조화서·주윤호·이명서·정원지·정문호·손선지·한재권 드이이 거주하다가 1866(병인)년 박해 때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이들은 189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또한 신전리는 분표 사건으로 씨족이 집단으로 개종한 곳이다.

  그후 1900년 상이암(성수면 성수리) ·새티(성수면 성수리) 공소가 설립되었고, 1901년에는 쑥재(신덕면 월성리)·시암내(새암내, 신평면 원천리)·구석리(관촌면 방현리) 공소가 설립되었다. 1902년에는 수방뫼(강진면 문방리) 공소가 설립되었고, 이때 임실 지역에 천주교에 대한 명성이 높아 수백명의 예비자들이 교리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후 1909년 양교에 대한 명성이 높아 수백명의 예비자들이 교리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후 1909년 양수정이 (관촌면 방현리), 1910년 구사발이(운암면 입석리)와 상운리(운암면 용운리), 1913년 두실(임실읍 두실리) 공소가 설립되었다. 그런데 이곳을 담당한 선교사는 전주 성당, 진안 성당, 수류 성당 신부들로 각기 다르다. 이로 보아 임실 지역은 1897년부터 전주 서당 소속이 되었으나, 공소의위치에 따라 다른 성당에 속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이렇게 설립된 공소들이 지속적으로 교세를 늘리면서 성장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데 1930년 철도가 개설되어 오수에 역이 생기게 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전주에서 100리 거리의 오수역 부근인 대명리를 개발시켜 모범 부락으로 만든 김현직이라는 사람이 천주교에 입교한 후, 그 가족이며 원근 친우들이 권면하여 천주교를 이끈 것이다. 그리고 전주 본당에서 파견된 박 바울라 씨가 열심히 지도하여 1년 여 동안에 예비 신자가 50-60명에 달했다고 한다.

  1935년 6월 16일 남원에 남원 성당이 설립되자, 임실에 있는 공소들은 남원 성당 관할 공소로 편입되었다. 그런데 1950년에 벌어진 6.25전쟁때에는 이곳 임실군에서 참혹한 희생이 벌어졌다. 완주군 상관면 신리 3구 어두리에 살던 남녀 신자 7명이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붙잡혀 임실군 신덕면 조월리로 강제로 끌려와서 타살되는 비극을 맞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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